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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가 내뱉은 비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은하는 유리와 단둘이 마주앉고서도 머릿속이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그럴 수야 있으니 유리가 레즈비언이라는 걸 상상도 못 하겠다고 말하기에도 그렇지만, 충격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고 은하는 방 한가운데에 펼쳐 놓은 앉은뱅이책상에 케이크를 놓으면서도 멍하니 딴생각에 빠져 있었다.
유리는, 어쨌든 생일이니 분위기를 띄워야 할까 고민하면서도 은하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내밀한 비밀을 밝히는 것이니 신중에 신중을 기해 잡은 기회였지만 썩 좋은 타이밍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어, 그럼….” 은하의 목소리에 유리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생일 축하해. 이제 1년만 있으면 어른이네.” 은하가 말했다. 살짝 웃고는 있었지만 그 목소리는 여전히 무덤덤했다.
“응, 고마워.” 관례적인 절차라고 해야 할까? 유리는 감사 인사를 하면서 케이크를 한 입 먹었다. 은하 역시 케이크를 야금야금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조촐한 생일 파티. 파티라고 하기에도 뭐하지만 지금은 둘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생일이라면, 조용하게 지내도 친한 사람들끼리 있을 때가 좋다고.

유리가 미리 사 둔 주스까지 마신 뒤, 둘은 침대에 기대어 앉았다. 창밖으로 풀벌레 소리가 들렸다, 은하가 앉아 있던 자리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얼마쯤 더 지난 뒤였다.
“은하야, 저건 뭐야?” 은하는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곧 유리의 시선을 끈 종이 가방을 열었다.
“네가 좋아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은하가 두 손을 모아 내민 것은 책이었다. ‘오르부아르’라고 적힌 제목이든 말 대가리를 뒤집어 쓴 사람이 그려진 표지든 미학적으로 누군가에게 선뜻 권할 만한 책은 아니었지만 유리는 미소를 지었다.
“이거…내가 읽고 싶다고 한 거지?”
“도서관에 없었고….”
유리는 표지를 한동안 들여다보더니, 양 팔을 뻗어 은하를 안아 주었다. 은하의 몸이 움츠러드는 것이 느껴졌지만 유리는 팔을 풀지 않았다.
“고마워. 제대로 답례 못 해서 미안해.”
은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뒤 유리는 팔을 풀고, 둘은 무릎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얼마간 어색한 침묵이 둘 사이를 휘감자 유리는 침대에 올라앉더니 의족을 떼어 냈다. 다리에 감은 밴드가 간지러웠다. 그것을 지켜보던 은하는, 비록 나름대로 편한 자세로 앉아 있었지만 다시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사고로 잃었다던 쪽의 맨다리를 직접 본 적이 없어서 그럴 것이다.
무릎 아래쪽 둥그런 그루터기에는 봉합선이 길게 뻗어 있었다. 거의 아물어 평소에는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었지만 형광등 빛을 받아 반들거리는 그루터기에서 그 선은 꽤나 선명하기 보였다. 은하는 그것을 두고 어떻게 말해야 할 지 몰라 우물쭈물하더니 일단 입을 열었다. “그 상처는….”
유리는 천장을 멀거니 쳐다보고 있던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미소가 사라지고 약간, 아주 약간 유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사고 났을 때 절단한 거야. 다 아문 줄 알았는데…많이 티 나?”
은하는 고개를 저었다.
“별로…그냥 밝아서 그런가 봐.”
그렇게 말하면서도, 은하는 원인도 위치도 다를지언정 유리 역시 비슷한 상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유리는 언제나 활기차고 유연하게 모든 것을 대하는데.
“처음 몇 개월은 받아들이기 힘들었어, 환상통 때문에 미치겠더라. 정작 손을 뻗어 보면 아무 것도 만져지지는 않는데…뭐, 좆같았지.” 유리는 한숨을 내뱉었다. 은하는 멍하니 유리를 바라보았다.
“미안해…그런 얘기 하게 해서.” 은하의 말에 유리가 고개를 들었다. 다시 미소가 피어 있었지만 공허할 뿐이었다.
“괜찮아, 다 지난 일인데.” 유리가 말했다. 은하는 그런 유리에게 아무 말도 해 주지 못 했다.
지난 일이라고 넘길 수 없다는 것을, 절대 잊히지 않는 상처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은하로서는 지난 일이라고 떠넘기려 하는 유리를 이해하면서도 동정하게 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죄책감이 밀려오는 것을 어찌 할 수 없었다.
“슬슬 정리할까?” 이후로도 몇 마디가 더 오가고, 창 밖이 어두워질 즈음 유리가 물었다. 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이만 가 볼게. 저…오늘 재밌었어. 피곤하지만.”
유리는 접시를 싱크대에 넣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래. 잘 자, 푹 쉬고.”

은하는 문을 닫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하루 종일 주인 없이 방을 지키고 있었던 침대의 차가운 감촉에 몸을 웅크리던 것도 잠시, 은하는 이불을 어깨까지 올려 덮고 몸을 웅크렸다. 낮의 일이 떠오르자 은하의 얼굴이 붉어졌다.
단추를 바로잡아 준 것도, 유리의 포옹을 받은 것도 전혀 예상하지 못 한 것이었다. 그 중 하나는 자신의 행동이었음에도 그랬다. 은하는 형광등 빛 아래에서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유리가 입은 와이셔츠의 감촉, 손끝으로 전해져 오던 그 부드러움을 떠올리던 은하는 이내 한숨을 쉬었다.
조금 더, 1분이라도 괜찮으니 유리를 더 보고 싶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다다르자 은하는 안 그래도 웅크린 몸을 더 움츠러뜨렸다. 명치 안쪽부터 무거운 덩어리가 들어찬 기분이었다. 전학 오고 나서 혼자 다닌 적이 며칠이나 되었을까? 수경이는 거의 반 강제로 식사니 이동수업이니 항상 은하를 포함한 몇 명을 대동했고 유리 역시 그들 중 한 명이었다. 수경이와 그 친구들이 집에 간 날에도 동아리 시간이 끝나면 함께 자율학습을 하고, 돌이켜 보니 혼자 있던 적은 잘 때를 제외하면 드물었다. 이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 한 일상이었다. 너무나 자연스러워져서 변화조차 느끼지 못 한 일상이었다. 은하는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외로움, 뼈에 사무치는 것 같은 외로움이 가슴 속을 채웠다. 시끄럽게 굴어도, 귀찮게 굴어도 결국 그것을 갈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한때 잊고 있었다는 사실 역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은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시 유리의 방으로 갔으면, 그리고 그 자리에서 유리와 더 오래 있었으면. 은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잠들었다.

한편 유리는 침대에 누운 뒤에도 한참 동안 의족을 달던 자리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은하처럼 끔찍한 환영이 떠오르는 것은 아니었지만 몸이 사고를 기억하는 것인지 버스에 타기만 하면 스멀스멀 한기가 밀려들어왔다. 사고가 났을 때 유리는 차체에 끼어 끊어진 다리를 붙잡은 채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 하고 길바닥에 쓰러졌다. 단순히 아프다는 것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들었다. 상처 부위에 둔탁한 충격이 느껴지고, 뇌에서 고통만을 차단한 것처럼 의식적으로는 아프다는 느낌이 없어도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심장이 곧 멎을 것처럼 거세게 뛰었다. 구급차가 오고, 병원으로 이송될 때쯤 유리는 반쯤 기절했었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죽을 고비를 앞두고 있었다. 다행히 아슬아슬하게 회복했지만, 이미 상처 부위는 썩고 있었고 무릎 아래는 절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에는 예의 환상통이 찾아 왔다. 언제든, 잘 때나 가만히 누워 있을 때는 물론이고 의족을 찬 채 걷는 연습을 하는 중이든 부모님과 얘기를 하는 중이든 저릿한 아픔이 다리를 붙들었다. 절단 수술이 끝나고 의식을 회복한 날 밤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다리를 더듬었다가 울음을 터뜨렸다. 이렇게나 생생하게 느껴지는 감각이 가짜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겨우겨우 학교에 돌아왔지만, 재활 치료에 문제가 생겨 결국 상주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따지고 보면 상당히 굴곡 많은 인생이었지만 유리는 그 과거를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갈구하며 나아갈 뿐이었다.
은하는 잘 있을까? 겨우 30분 전에 돌아갔고 문 한두 개 넘어 은하가 있는데도 유리는 무의미한 걱정을 하고 있었다. 어째서일까? 수경이나 현이나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변명거리도 있었지만, 다른 날로 옮겨도 되는 것을 왜 굳이 은하만 불러서 축하한 걸까? 여자가 좋다는 사실은 수경이와 현, 둘에게만 말한 비밀이었고 한동안은 아무한테도 드러낼 생각 없었다. 왜 은하에게는 드러낸 것일까? 유리는 그렇게 의문을 던지다가 잠들었다. 유리가 지금까지 보낸 생일 중에서는 꽤 가라앉은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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