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말고사와 방학이 한꺼번에 다가오고 있었다. 가을도 끝자락에 접어들고 있었고, 다시 시작한 은하의 생활도 궤도로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은하에게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너, 커서 무슨 일 할지는 생각해 본 적 있어?” 아침, 유리를 기다리던 중 현이 묻자 은하는 고개를 저었다.
“한 번도….”
“그럼 좋아하는 건?”
은하는 대답을 망설였다.
“책이랑…사진 정도?”
“생각이라도 좀 해 봐. 우린 이제 나이가 있잖아.”
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마음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 이제는 나이가 있다. 말인즉슨 미래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었다. 몇 년 늦게 사회에 나가도 된다고는 하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병원에서 지낸 날과 과거의 파편에 시달리는 날은, 슬프지만 변명거리로 삼을 수는 없었다. 은하가 그렇게도 싫어하던 동정표는 될 수 있겠지만.
은하는 그 과거에 의문을 품은 적이 한둘이 아니었다. 왜 하필 자신에게 왔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왜 이렇게 와서 괴롭히는 거지?
“유리 나온다.” 현의 말에 은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유리가 기숙사 건물에서 나오면서 손을 흔들었다.
“늦잠 잤어, 미안해. 근데 넌 왜 왔어?” 현에게 하는 말이었다. 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왜, 은하랑 데이트 하고 싶었는데 내가 끼어들었어?” 웃으며 장난조로 한 말이었지만 은하의 얼굴을 붉히기에는 충분했다.
“뭐야, 갑자기 왜 그래?” 유리까지 머리를 긁적이며 외면하자 현은 둘을 슬쩍 보더니, 키득키득 웃으며 자리를 비켜 주었다.
“야, 잠깐 있어 봐! 그런 거 아니거든!” 현이 세 발자국에 한 번씩 웃으면서 멀어지자 유리는 당장이라도 죽일 것 같은 표정으로 쫓아가기 시작했다. 그런 둘을 바라보던 은하는 얌전히 발걸음을 옮겼다. 왜 부끄러워 한 거지? 유리를 ‘친구로서’좋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넘어 가더라도, 데이트라니…사각에서의 일격이었다. 유리와 단둘이 있는 시간은 즐거웠지만, 데이트라고 하기에는 부족했다. 아니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을 뺏겨 버린 걸까? 이 가식으로 시작된 관계에? 유리가 현에게 헤드록을 걸고 돌아올 때쯤 은하는 미소를 지었다. 가식은 시작뿐이었다. 유리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선생님께 몇 번이나 말했었다. 유리가 자신을 싫어하더라도 상관없으니 유리에게 부담을 주면서까지 자신에게 신경 써 주게 하지 말라고. 선생님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지금은 둘 모두 믿고 싶었다. 목요일 저녁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기 힘들 정도로 급히 흘러갔다.

아침, 높고 규칙적인 알람이 울리자 유리는 눈을 떴다. 주말까지는 아직 하루가 남아 있었다. 그런 만큼 각자 나름대로의 격렬한 전야제가 암묵적으로 허용되는 금요일이었다. 그와 별개로 몸을 일으키던 유리는 갑작스러운 추위에 몸을 움츠렸다. 가을도 이제는 겨울로 달음박질치고 있었다. 앞으로는 내복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유리는 그렇게 생각하며 몸을 씻은 뒤 교복을 입었다. 곧 노크 소리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수경이었다.
“장유리, 늦잠 자냐? 은하도 왔으니까 빨리 나와!”
유리는 문을 열었다. 수경이의 뒤로 은하가 손을 흔들어 주었다.
“잘 잤어?” 은하가 물었다.
유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문을 닫았다.
“가자, 오늘만 버티면 되니까….” 수경이가 반쯤 한숨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은하는 ‘옛날에 내가 죽은 집’이라는, 음산한 표지의 책을 품에 안고 있었다. 자리에 앉기 무섭게 책을 읽기 시작한 은하는 유리가 교과서를 한 아름 들고 와 가방에 넣고 자리에 털썩 주저앉자 입을 열었다.
“저기…내일 시간 있어?”
“있기는 한데, 왜?”
은하는 초조한 듯 책상에 닿을락 말락하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꼬았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 한 건지 평소보다 더 부스스해 보였다.
“별 건 아닌데…내일 잠깐 밖에 나가야…해서, 혹시 너도 시간 된다면….” 은하는 반쯤 웅얼거리듯 말했다.
“오후라면 괜찮지만 오전에는….”
“그, 그러면 오후라도…괜찮으니까. 할 말이 있어.”
유리는 어이가 없어 입을 다물어 버렸다. 할 말이 있다면 전화도, 문자도 있다. 사적인 것이라면 기숙사 방에서 해도 될 얘기를 밖에서? 물론 그렇다고 거절할 생각은 없었다. 시내에 나가는 것도 거의 한 달 만이었다. 은하라면 어딜 가고 싶어 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럼 육교에서 만날까? 내일…2시?”
교문 앞으로 내려가면 큰길 바로 앞에 공원과 육교가 있다. 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 수업이 시작되었지만 은하는 한참을 안절부절 못 하는 듯 했다.

금요일은 빠르게 흘러갔다. 앞으로 있을 모의고사니 기말고사니 자잘한 안내가 있었지만 대다수의 학생들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앞으로 얼마나 즐기게 될지 모를 학교생활,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것을 선생님 역시 아는 탓에 아이들의 무관심에 대해 별 말은 하지 않았다.
은하는 다 읽은 책들을 가방에 넣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유리가 바싹 쫓아왔다.
“근데, 굳이 그 말을 시내에서 해야 돼?”
“그냥…그런 게 있어..” 은하가 말했다. 대답을 주저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 유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있다 봐….” 유리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도서관 앞이었다.
“응, 오늘도 저녁 식사?”
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살짝 미소를 지었다.

토요일, 은하는 유난히 머리를 오랫동안 다듬은 뒤 옷장에서 외출복을 꺼내들었다. 교복이나 후드티는 아니었다. 기숙사 생활을 하다 보니 그것들은 외출복이라기보다는 생활복이라는 이미지가 강했고, 은하가 ‘외출복’이라는 이름을 붙여 놓은 옷은 단 한 벌뿐이었다.
청바지에 검고 긴 리본을 묶은 흰 블라우스, 그 위에 검은 카디건을 걸치고 이어폰을 목에 건 단순한 복장이었지만 기숙사에서 은하의 모습을 봐 왔던 몇몇 아이들에게는 그야말로 초유의 사태나 다름없었다. 무슨 일 있냐는 물음이 빗발쳤지만 은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토요일이니 기숙사는 학교를 나오지 않을 때의 적적함과는 거리가 멀었고, 결국 은하는 약속 장소인 육교 앞까지 도망치듯 걸어 나왔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떠 있는 가을의 햇살은 따가웠지만 금세 바람이 열기를 식혀 주었다. 곧 전화가 울렸다. 유리였다.
“도착했어? 미안해, 조금 늦을 거 같아.”
“괜찮아…옆에 공원에서 기다릴게.” 은하는 전화를 끊었다. 공원 벤치에 걸터앉아 하늘을 바라보았지만 흰 솜조각들은 보이지 않았다.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이 무겁게 느껴지기 시작할 무렵 유리가 멀리서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은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 늦어서….” 유리는 숨을 몰아쉬더니 허리를 쭉 폈다.
“괜찮아. 어디 카페라도 가서 얘기할까?”
유리는 대답 없이 은하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은하의 옷을 보고 있는 것이겠지만.
“장유리?” 은하가 이름을 부르자 유리는 화들짝 놀라 시선을 들었다.
“아, 아냐. 그냥 어…그렇게 입은 건 본 적 없어서, 예쁘네.” 유리는 잠시 정신을 놓고 은하를 바라보았던 것을 자책이라도 하듯이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그래…? 외출복은 이거 하나뿐이라….” 은하는 얼굴을 붉히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나름 귀여운 모습이었다.

가장 먼저 둘이 들른 곳은 서점이었다. 학교의 도서관은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니었지만 모든 책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은하는 소설책 몇 권을 고른 뒤 유리를 쳐다보았다. 유리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라는 제목의 책을 들춰 보고 있었다.
“그거…도서관에 있지 않아?” 은하의 물음에 유리가 고개를 들었다.
“그랬어?”
“응, 다음에 찾아 줄게.”
유리는 웃으며 책을 덮었다. 그 두께로 봐서 한 번에 읽기는 어려울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선뜻 구매하기에는 부담스러운 가격이었던 것이다.
이후 카페에서 은하는 말을 아꼈다. 창밖이나 찻잔 속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도 간헐적으로 사람들 쪽을 흘끔거리는 것을 본 유리는 빨리 마시고 사람이 적은 곳으로 가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해가 져 오자 둘은 공원에서 멈춰 섰다. 붉은 노을이 저물고 있었다.
“오늘 재밌었어, 근데…할 말 있다고 하지 않았어?” 벤치에 앉아 붉게 타오르는 하늘을 바라보기를 얼마, 유리가 물었다.
은하는 고개를 휙 들었다. 그 순간까지도 은하는 그 말을 해야 하나 헛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곧 은하는 입을 열었다.
“사고…였어, 너처럼.”
유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사고?
“무슨 사고?”
은하는 말없이 유리의 손을 잡았다. 흉터의 울퉁불퉁하면서도 매끄러운 느낌이 전해져 왔다.
“어릴 적에…8년쯤 전이었어. 집에 불이 나서 이렇게 된 거야.”
그 말을 끝으로 은하가 한참 동안 말이 없자 유리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말…하고 싶었던 거야?”
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에 네 상처 보고 나서 생각해 봤어…내 상처도 조금은 알려 줘야 할 것 같아서.”
유리는 아무 말 없이 은하와 맞잡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연보라색 흉터는 전혀 아름답지도, 학생이라는 나이에 어울리지도 않았다. 특수학교에서 지내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하지만 은하처럼 심한 사고를 겪은 경우는 없다시피 했다. 은하의 모습을 슬쩍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그런 사고를 겪었다면, 대부분 죽어야 정상이다. 은하는 죽어야 할 운명에서 벗어난 이방인이었고, 여전히 그 과거의 기억에 붙들려 있었다. 동정이라면 동정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불쌍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저, 지금도 은하가 느끼고 있을지도 모를 공허한 슬픔만이 느껴질 뿐이었다. 유리는 은하를 가만히 쳐다보다 다른 손으로 은하의 머리칼을 쓸어 주었다. 은하는 고개를 들려다가 다시 숙였다. 두 눈이 젖어 있었다.

Photo by Mateo Abrahan on Unsplash

“슬슬 들어갈까? 조금 있으면 밤인데.” 유리가 말했다. 은하는 고개를 저었다.
“조금만 있다가. 지금은…너랑 조금 더 가까이 있고 싶어.” 은하는 그렇게 말하며 유리의 어깨에 기댔다. 유리의 몸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야. 그냥….”
유리는 은하의 뒷말을 몰라 그저 노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더 말을 잇지 못 하고 그 모습을 불안한 눈빛으로 쳐다보던 은하는 이어폰 줄을 꼬기 시작했다. 마치 이 순간, 이 상황에서 잠깐만 벗어나고 싶다는 태도였다. 유리는 은하를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음악, 괜찮으면 같이 들어도 될까? 한 곡만.”
은하는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폰을 꽂자 잔잔한 기타 소리가 흘러나왔다. 유리는 생판 들어 본 적 없는 딥 퍼플의 ‘Sometimes I feel like screaming’이라는 곡이었다. 은하는 눈을 감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유리는 박자에 맞춰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은하가 하는 것처럼 눈을 감아 보았다. 물결을 연상시키는 음이 무색하게 순식간에 드럼 소리와 함께 격렬한 음색이 귀를 뒤덮었다. 유리는 미소를 슬쩍 지어 보였다. 이것이 은하의 세계구나. 7분이 넘는 긴 시간이 지나자 은하는 음악을 멈추고 이어폰을 뺐다. 유리 역시 그렇게 했다.
“노래 좋네.” 짧은 감상평이었다. 반복적인 멜로디가 점점 고조되지만 노래는 끝까지 외로운 분위기를 고수하고 있었다. 은하에게 꼭 어울리는 노래였다.
“제일 좋아하는 곡이라서…굳이 같이 듣자면 이게 제일 나을 거 같았어.”
유리는 음악에 충분히 만족한 듯 몸을 쭉 폈다.

해가 지기 직전 둘은 기숙사로 돌아왔다. 아무도 없어 고요한 로비에서 은하는 질문을 던졌다. 왜 같이 음악을 듣고 싶다고 했냐는 것이었다.
유리는 한동안 대답 없이 의족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입을 열었다.
“그냥…궁금했다고 해야 되나? 너에 대해서 더 알고 싶었어. 왜 듣는지도 궁금했고.”
은하는 귀 너머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꼬았다.
“부모님이…좋아했어.”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구나…특이하시네, 두 분.” 유리가 말했다.
“나보다 더 좋아하는 줄 알았어. 어릴 적이었으니까. 그런데….” 은하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한눈에 봐도 자신을 억제하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결국엔 날 구했어. 나보다 더 좋아하는 게 있었는데도 나 따위를 구했다고. 그 결과가 이거야.” 은하는 중얼거림에 가까운 목소리로 말하다 피식 웃었다. 유리는 고개를 푹 숙였다. 축제 때 은하의 부모님에 대한 얘기를 쉽게 꺼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도 똑같은 실수를 한 것이다.
“미안해, 이런 얘기 꺼내서.”
은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방문을 열고 들어가서는 침대에 몸을 던질 뿐이었다.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자신보다 더 좋아하는 줄 알았던 것들은 불에 타게 내버려 두고서는 자신을 구하다니. 그런데도, 어린 시절에는 질투의 대상이었던 것을 좋아한다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니. 은하는 어째서인지 그것이 너무 웃겨 참을 수 없었다. 발작적으로 시작된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숨죽여 웃던 키득거림에 눈물이 한 줄기 흐르고, 그 눈물이 울음으로 바뀌기까지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은하는 그렇게 조용히 눈물을 흘리다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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