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을 보니 축제는 2주 뒤였다. 회의는 미리 끝내고 준비는 학기 내내 짬짬이 하는 방식이라 그런지 다들 어느 정도 견적을 뽑아 놓은 것 같았지만 바쁜 시기에 전학을 왔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별로 신경 쓰지 않았지만.
신경 쓰이는 것이 있다면 유리였다. 이틀을 결석한 유리는 목발을 짚고 등교했다. 의족은 어디론가 사라졌지만 원래 그것이 붙어 있던 자리를 오늘은 양말 같은 주머니가 대신하고 있어 맨다리를 볼 수는 없었다. 유리는 평소처럼 인사했지만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마치 ‘잘못 건드리면 어떻게 될지 몰라.’ 같은 기운을 온몸으로 뿌리고 있는 것 같았다. 때문에 은하는 유리가 자신에게 먼저 말을 걸기 전까지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은하야, 혹시 시간 괜찮아?”
은하는 왜냐고 물었다. 다리 때문에 움직이기가 힘들어져서, 이틀 정도만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특별히 피곤하거나 컨디션이 안 좋은 날도 아니거니와 정말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도서부라고 해도 적극적인 아이들이 있는 법이다. 대출, 반납 관리나 장서 정리는 순식간에 자리가 찼고 은하는 파손된 책들을 찾아 버리거나 고치는 일을 하게 되었다. 은하는 아무런 불만도 표하지 않았다. 약속이 잡혀 버려서 그런지 수업이 여느 때보다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방과 후, 유리는 체조부에 가지 못 했다. 의족이 닿던 부분에 상처가 난 탓에 연습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유리는 은하가 책장을 훑어보며 망가진 책을 찾는 동안 옆에 앉아 있을 수 있었다. 은하는 책등이 거의 떨어진 ‘연금술사’를 빼내어 펼쳐 보았다. 책등뿐만 아니라 페이지도 몇 장 빠져 있었다. 은하는 그것을 유리가 한창 읽고 있던 책 앞에 내려놓았다. 다시 은하의 몸이 책장을 향하자 유리는 시선을 돌렸다.
평소에는 축 쳐져 있던 두 어깨에 힘이 들어간 채 손끝으로 책등을 훑는 모습은 유리가 알고 있던 은하의 모습과 완전히 달랐다. 천천히, 책들의 내용을 하나하나 읽어 들이는 것처럼 섬세한 은하의 움직임에 유리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름답다. 그저 평범한 움직임일 뿐일지라도 유리는 그 모습이 아름답다고 느꼈다. 은하는 두 권을 더 빼내어 살펴보았다. 둘 모두 고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은하는 그것들을 대출대 너머에 넣은 뒤 유리가 앉아 있던 책상 앞에 앉았다. 둘의 눈이 마주치자 은하는 급히 머리카락으로 흉터를 가렸다.
“아, 미안해. 보기 좋아서 어쩌다가…놀랐어?” 유리의 말에 은하는 고개를 저었다.
“놀라진 않았어, 그냥…괜찮아.” 은하가 말했다.
유리는 아침부터 읽고 있던 책을 꺼내는 은하를 곁눈질로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은하는 주변에 눈길 하나 주지 않고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처럼 내용에 빠져들었다. 가끔 가다 은하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웃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도 못 할 만큼 책에 몰입하는 것이 분명했다. 유리 역시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흉이 진 탓에 은하의 한쪽 입 끝은 조금 뻣뻣하게 올라갔지만 은하는 지금까지 유리가 봐 왔던 모습 중 가장 자연스럽고 편안해 보였다. 잠시 뒤 종이 울리자 은하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유리가 목발을 짚고 일어나자 은하는 유리의 옆으로 갔다. 둘은 도서관을 나섰다.
“축제 말인데….” 간만에 사치를 부릴 거라고 결심한 유리 탓에 들른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기다리던 중, 은하는 유리에게 말했다.
“응? 아…지난번에 카페에서 말한 거?”
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랑…최수경이랑 같이…한 번 가보고 싶어.”
유리는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었다. 은하는 유리의 미소를 보자 얼굴을 붉히더니 음식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고 은하는 유리와 함께 기숙사로 발걸음을 옮겼다. 유리는 목발이 익숙하지 않은지 걸음이 조금 느렸다.
“무슨 일 있었어…?” 은하가 물었다.
“그냥 상처야. 조금 무리했더니.” 유리가 대답했지만 은하는 아직 할 말이 남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다리…어쩌다 그렇게 된 거야?” 은하는 유리의 다리 한 쪽 그루터기를 보고 있었다. 유리는 잠시 하늘을 쳐다보더니 말했다.
“자세한 건 기억 안 나지만…사고였어. 교통사고.”
은하는 “아.” 하고 짧게 반응한 뒤 입을 다물어 버렸다. 유리가 방으로 들어갈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교통사고. 다리를 잃은 것은 그저 사고였다.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침대에 누운 유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기억하지 못 한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떠올리기 싫을 뿐이었다. 상처를 꿰매던 바늘, 절단을 논의하는 의사와 눈물을 흘리던 아버지, 전신 마취의 몽롱한 도취감.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유리는 고개를 세게 저었다. 더 이상 그만, 떠올리기 싫은 것들이다. 유리는 다리를 감싸고 있던 주머니를 멀리 던져 버리고 이불을 목까지 올려 덮었다. 한편 은하는 20번째 줄을 긋고 달력을 내려놓았다. 침대에 누웠지만 바로 잠들지는 않았다.
왜 유리에게 다리에 대한 것을 물어본 거지?
사고 때문이라는 대답을 들었는데, 그래서 뭐?
유리와 동질감을 느꼈던 건가? 똑같이 사고의 피해자니까 잘 지내보자고?
“아냐, 전혀….” 혼잣말. 듣는 이 없는 말이었지만 즉시 대답이 돌아왔다.
자신도 흉터가 생긴 이유를 말하기 싫어한다. 그러면서도 남의 상처일지도 모르는 부분을 찌른다? 은하는 눈을 감고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듣기 싫다.
“그만 해, 그만….” 방 안의 모든 것들이 움직이는 것 같다. 그것들이 말을 걸어온다. 한 마디씩, 느릿하게. 이명이 귀를 덮자 은하는 눈을 떴다. 즉시 형광등 빛이 눈을 공격했다. 은하는 몸을 웅크리고 이 모든 것들이 지나가기를 빌었다. 평소에 신을 믿지 않아도 이럴 때만큼은 책에서 읽었던 모든 신들에게 기도를 올렸다. 이윽고 이명이 가라앉자 은하는 땀에 젖은 채 침대에 몸을 뉘였다. 지쳐 쓰러졌다는 말이 어울릴까, 은하는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른 채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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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뭐 하는지 얘기 했나?” 둥그런 안경을 쓴 반장이 물었다. 은하는 고개를 저었다.
“귀신의 집을 할까 생각했었는데 다른 반이 이미 했더라. 그래서 사진촬영부랑말같이 사진전 열기로 했는데, 다른 의견 없지?” 반장은 빠르게 말을 쏟아 냈다. 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축제를 간다고 말을 꺼냈지만, 여전히 은하는 축제에서 이렇다 할 역할을 맡지 않았다. 반에서 할 일도 없으니 유리와 수경이랑 같이 다니는 것만이 유일하게 할 일로 남았다. 그것에 대해 딱히 불만은 없었다. 단순히 도서관에 틀어박혀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유리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며 입을 열자 은하는 적잖이 실망했다.
“미안, 상처가 낫는 데로 체조부 공연에 참가해야 된데. 하루쯤은 수경이랑 다녀도 괜찮지?”
“상관없어. 미안해 할 일도 아니고.” 조금은 유리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은하는 잠자리에 누운 채 그런 자신을 질책했다.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1주일이 흘렀다. 유리는 다시 의족을 찼고, 예전의 활발한 태도 역시 되살아났다. 축제가 가까워지면서 연습에 몰두한 유리를 뒤로하고 은하는 선생님의 권유에 따라 사진촬영부에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상주고등학교 주변에는 꽤 깊은 숲과 강이 있었다. 주변에 사는 주민들이 나름대로 보호책을 펼쳐 본래 모습을 잃지 않은 강이었다. 그곳에서 찍은 사진들을 지켜보던 은하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뱉었다.
“이거 예쁜 거 같아.”
“그래? 그거 버리려고 한 건데….” 선배들의 권한 위임을 빙자한 직무유기로 은하와 교실에 남게 된 숏컷 여자아이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은하가 들어 보인 사진은 황금빛 노을과 강 주위의 갈대밭을 배경으로 3명의 가족의 실루엣이 찍힌 사진이었다. 차분한 느낌이었지만 초점이 맞지 않아 약간 흐릿했다.
“괜찮지 않아? 신비로운 분위기잖아.”
“그렇다는 말은 들었지만…모르겠다, 너 가질래? 어차피 내가 찍은 건데.”
“정말? 나야 고맙지만….”
숏컷을 한 아이는 무언가에 홀린 듯 사진들을 훑어보는 은하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특이하다’를 넘어서서, 약간 괴상하다고도 할 수 있을 취향이었다. 신비로운 분위기라는 말을 들었다고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기초적인 초점을 못 맞춘 것에 대한 조롱에 가까웠다. 그런 실패작을 두고 저렇게 좋아하는 사람이 나올 줄은 몰랐다.
“넌 그런 분위기가 좋아?” 그 아이는 은하에게 조금 더 말을 걸어 보기로 했다.
“분위기라기보다는…그냥, 그런 게 있어.” 은하는 그 사진처럼 초점이 맞지 않은 눈으로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아이는 그쯤에서 더 캐묻지 않기로 했다. 그저 원한다면 가져도 된다고 말할 뿐이었다.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꽤 빨리 끝났네?”
“상처가 덧나면 안 되니까 빨리 끝냈어.” 유리가 말했다. 은하는 자신을 정 현이라고 소개한 숏컷 여자아이와 함께 유리를 기다렸다. 동아리 시간이 끝난 뒤에도 유리는 10분이 더 지나서야 나왔다. 유리를 보자 조금은 생기를 띄기 시작한 은하를 보던 현은 손을 흔들었다.
“나 간다. 이름이…은하랬나? 괜찮으면 주말에 전시 세팅하는 거 좀 도와 줘.”
“나 힘 약한데….”
“괜찮아, 안 무거워.”
현이 간 뒤 유리는 곧바로 웃음을 터뜨렸다.
“쟤 괜찮은 애지? 너, 나한테 할 때보다 쟤한테 더 빨리 말 건 거 알아?”
“사진…때문에. 저렇게도 할 수 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어.”
유리는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곧 그렇구나 하는 식으로 미소를 지었다. 둘은 기숙사로 출발했다. 그러는 동안, 은하는 언제부터 유리와 같이 다니는 것이 자연스러워진 것인지 기억해 보려 했지만 전혀 기억할 수 없었다. 만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사이가 아닌 몇 년간이나 친하게 지냈던 것 같은 둘의 모습이었다.

토요일. 은하는 상주고등학교에 전학 온 지 한 달째 되는 날의 오전을 짐을 옮기는 데에 썼다. 현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면서 은하를 기다리고 있었다.
“왔어? 이거랑 저거, 그리고 있다가 올 이젤까지 옮기고 나서 세팅하면 돼. 주말까지 불러서 미안하다 야.”
“별로…상관없어.”
현은 정말 상관없는 건지 물어볼까 하다가 ‘뭐 어때’하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그와는 반대로 은하는 박스 안에 가지런히 정리된 사진들의 양에 충격이라도 받은 것 같았다.
“이거 다 사진전에 쓰려고?”
“그럴 리가 있냐? 사진은 그거 하나면 끝이고, 다른 박스는 미술부 거야. 사진전 말고 학교 안에 붙일 것들도 있어서 그래.”
은하는 구태여 대답하지 않았다. 사진을 옮기는 중에도, 이젤을 복도에 배열하는 동안에도 입을 열지 않았다. 결국 다시 말을 꺼낸 것은 현이었다.
“사진 찍는 거 좋아해?”
은하는 고개를 저었다.
“손이 떨려서….”
“수전증?”
“비슷해…스트레스 때문이라고 하더라고.”
현은 사진 몇 장을 어떻게 배열하는 것이 좋을까 고민하는 은하를 슬쩍 쳐다보았다. 하긴, 저 정도면 스트레스도 상당할 것이다. 솔직히, 객관적으로 보기 좋은 외모는 아니니까. 넓은 교실을 순식간에 이젤에 올려놓은 사진이 채운 뒤에야 은하는 허리를 쭉 폈다.
“유리한테 들었는데, 전학생이라며? 꽤 빨리 적응하는 거 같네?”
“아, 그게…유리가 많이 도와주고 있어. 계속 같이 다니는 것뿐이지만.”
현은 턱을 긁적거렸다.
“유리 원래 잘 안 그러는데.”
“무슨 뜻이야?”
“아냐, 그냥 너랑 마음이 잘 맞나 싶어서. 너랑 같이 다니기 전까지는 딱히 친한 애가 없었거든. 안 친한 애도 없었지만…최수경도 그러잖아. 다른 애들하고도 노는 거.”
은하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교실을 나섰다. 현이 밥이라도 사주겠다고 했지만 거절했다. 기숙사 침대에 누워 눈을 감자 유리의 얼굴이 떠올랐다.
유리에게, 수경이에게 자신은 대체 무슨 존재일까? 혹시 그저 방해만 되는, 귀찮은 존재이지 않을까? 꼬리에 꼬리를 문 질문이 겹치자 은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둘, 정말로 친구일까?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무서웠다. 둘의 실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월요일부터 축제다. 의심으로 꽉 찬 채 축제를 맞이했다간…. 하는 식이었다. 결국 그날 은하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일요일에는 체력의 한계에 다다라 기절하듯 잠들고 말았다. 그 직전까지 은하의 머릿속에는 걱정이 몽실몽실 피어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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