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는 은하를 보자 멀리서부터 손을 흔들었다. 은하는 그 모습을 보고는 발걸음에 속도를 붙였다. 유리의 생일. 방에서 간단하게 할 거라는 말이 무색하게 유리는 시내에 잠깐 나가자는 제안을 했다. 자신만의 특별한 사정 말고도, 하고 싶은 말이 있기도 했다.
“별 건 아냐, 오빠가 줄 게 있다고 했거든.”
“그럼…뭐라도 살까? 같이 돌아다니면서….”
유리는 당연히 동의했다. 둘은 지하철을 타고 약속 장소까지 향했다. 상주고등학교는 시내와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덕분에 웬만큼 한가하지 않고서야 시내에 자주 나가는 아이들은 드물었다.
“야, 다친 데는 나았냐? 지난번에 문자했잖아, 목발 싫다고.” 유리가 ‘오빠’라고 부른 남성은 강아지 같은 것을 대하듯 유리를 쓰다듬으면서도 선물을 두 손에 쥐여 주었다. 유리는 눈살을 찌푸렸다.
“언제 얘길 꺼내는 거야, 오빠 계속 그거 가지고 말하면 엄마한테 이른다?”
“그렇게 쪽팔리면 다치질 말던가.”
그 남자는 은하를 보고도 별 말 하지 않았다. 유리 덕분에 장애인을 대하는 데 별 감정이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래서 입대는 언제야?” 유리가 물었다.
“다음 달. 배웅해주게?”
“아니, 저주하려고.”
장난일까? 그 남자는 실실 웃으며 유리를 때리는 시늉을 하고, 유리는 여유롭게 받아 넘겼다.
“저, 그럼….” 은하가 말을 꺼내자 둘 모두 은하를 돌아보았다.
“참, 처음 만났는데 인사도 안 하고 예의 없게 굴었네. 나 유리 오빠야, 반가워.”
은하는 머뭇거리다 악수를 했다. 그 남자는 은하의 인상을 단박에 파악했는지 그 뒤로 더 말을 걸지는 않았다.

“오빤 매번 돈으로만 선물한다니까.” 둘만 남게 되자 유리는 자그마한 봉투를 흔들거리며 말했다.
“한 번쯤은 다른 것 주면 안 되나 몰라.”
“친오빠야? 별로 안 닮은 거 같은데.” 은하는 유리의 푸념을 자르고 질문을 던졌다.
“친오빠 맞아. 안 닮아서 그렇지.”
“남자 친구인 줄 알았어….” 은하는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유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저런 남자랑 누가 사귀어? 키만 멀대 같이 큰데. 아무튼 뭐 살까?”
“케이크랑…그런데 이런 걸 왜 하는 거야?” 케이크부터 사기로 결정하고, 제과점에 들어선 은하는 자신도 내심 들떠서 여기저기를 둘러보면서도 조심스럽게 물었다.
“뭐 특별한 이유는 없는데….” 유리는 치즈 케이크 앞에서 멈추더니, 두 조각을 사느라 말을 잠시 멈췄다. 다시 거리로 나선 뒤에야 유리는 입을 열었다.
“교통사고 얘기 했었지? 그때 느꼈어, 내가 언제든 죽을 수 있다고. 그래서 이런 거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살아 있다는 생각이 잘 들지 않아.”
“그럼 체조도?”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리 치료 때문에 시작했어. 지금은 가장 좋아하는 게 됐지만.”
은하는 몇 걸음 앞서 가는 유리를 바라보았다. 살아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은하가 보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은하는 조금 더 물어 보기로 했다.
“저기…난 좀 부러워. 그렇게 활기차게 지낸다는 거.”
“겉보기에만 그런 거야.”
“겉보기에만?” 은하가 물었다.
유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공허했다. 지금까지의 유리한테서는 상상도 하지 못 할, 하얀 가면 같은 미소였다.
“무대나 학교에서는 한 곳에 집중하니까 떠올릴 겨를이 없다고 해야 하나, 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거의 잊어버렸거든. 기억나기는 하지만…내가 왜 이렇게 된 건지, 어떻게 사고를 겪었는지 설명할 수도 없어. 그냥 사고가 있었다는 것만 기억나.”
은하는 유리를 쳐다보았다. 정말 잊을 수 있을까? 다리 하나를 잃었는데도? 아침마다 그 자국을 봐야 하는데도? 자신의 흉터도 잊고 나면 그저 자국에 불과한 것이 되는 걸까?
은하의 표정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유리는 입을 다물었다. 외출은 그렇게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갑작스럽게 가라앉아 버린 분위기에 둘은 역으로 향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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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지하철을 탔다. 버스를 타고 가도 되지만 유리는 이상스럽게 지하철을 고집했다. 은하가 그것에 대해 별 신경 쓴 것은 아니지만.
은하는 한 쪽만 이어폰을 꽂은 채 지하를 빠져나온 창밖을 바라보았다. 지방이라 해도 적당히 큰 도시라지만 은하에게 익숙한 대도시와는 다른 세계인 것 같았다.
건물들은 대체적으로 크고 화려하기보다는 수수하고 상대적으로 작은 크기를 고수한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가로수는 이제 완전히 가을이라는 말을 전하듯 저마다 붉고 노란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은하는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을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유리는 피곤한 건지 눈을 감고 있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아침 일찍부터 먼저 나와 있었으니 졸릴 것이다. 한동안 위태롭게 고개를 끄덕이던 유리의 몸이 은하 쪽으로 쏠렸다. 의외로 무거웠는지 은하는 몸을 움츠렸다.
“아, 미안…무거워?” 유리가 웅얼거렸다.
“괜찮아.” 은하가 대답했다. 무겁기는 했지만 어깨의 옷자락을 타고 따뜻한 체온과 숨소리에 맞춘 움직임이 전해지는 게 나쁘지만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은하는 그 움직임과 무게감을 즐기고 있었다. 유리는 따뜻하고 적당히 묵직했으며 잠에 취한 얼굴은 귀여워 보이기까지 했다. 은하는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물었다.
“우리 금방 내려야 하는 거 아냐…?”
“조금만 이러고 있을게….” 유리가 대답했다. 이어폰을 빼 놓지 않았더라면 듣지 못 할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다. 퇴근 시간이라 역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타고 내렸다. 은하의 흉터를 힐끔거리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대부분 피곤해서 그런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은하는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 유리는 느릿하게 숨을 쉬다가 눈을 게슴츠레 떴다.
“도착했어?”
“다음 역이야.”
침묵. 유리는 말없이 가방을 꺼내 품에 안았다.

은하는 학교가 역과 그리 가깝지 않다는 점을 다시금 실감했다. 언덕 때문에 오가는 데 20분은 걸리는 것 같았다. 유리는 조금 전의 피로와 어두운 분위기를 거의 떨쳐냈는지 수다를 떨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연애 얘기로 넘어가게 되었다. 아무래도 유리의 오빠를 만난 영향이 클 것이다.
“넌…좋아하는 사람 있어?”
“아직은. 왜?”
“그냥, 꽤 성숙한 인상이고…성격도 좋고. 인기 많았을 거 같아.”
반쯤은 자신의 생각도 담겨 있었다. 유리는 굳이 체조를 하는 모습이 아니더라도 확실히 아름다웠다. 아직 고등학생이지만 어른이라고 해도 될 수준이었다.
“글쎄, 연애는 한 번 해봤는데…며칠 만에 사고 났었고 여기 온 뒤에는 연락이 끊겼어.”
“그래…?”
“왜, 뭐 할 말 있어?”
은하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궁금해서. 내 상처까지 좋아해 줄 사람이 있을까 싶어서.”
유리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 말, 지금 해야 할까? 하지 않으면 영원히 못 할 것 같았다.
“있겠지. 꼭 남자여야 한다는 보장은 없잖아.”
은하의 표정은 잠깐 유리의 말을 이해하려 하다가, 곧 새빨개졌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진지하게 하는 얘기에….”
“아니, 그냥. 그 애랑 연락이 끊어진 이유가 사고 하나만은 아니라서.”
은하는 얘가 왜 이런 말을 하나 싶은 표정으로 유리를 쳐다보다가, 곧 “어?” 하는 소리를 뱉었다.
“너 그럼….”
유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응, 나 여자가 좋아.”
은하가 유리를 홱 돌아보았다.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유리는 조금 후회하는 듯 은하에게서 시선을 뗐다.
“…내 비밀이야, 다른 사람한테 말하지 말았으면 해. 넌 믿을 수 있으니까 말한 거야.”
얼마나 어리석고 의심이 적은지. 은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 다시 유리를 쳐다보았다.
“말 안 할게. 너무 걱정 마.”

“저기, 장유리, 잠깐만….”
유리는 길바닥에 닿아 있던 시선을 은하에게로 옮겼다. 잠깐의 외출이었지만 몇 번이나 가라앉은 분위기는 쉽게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은하는 망설이더니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유리의 가슴팍으로.
“단추 잘못 채웠어…아깐 몰랐는데.” 은하는 그대로 유리가 입은 와이셔츠의 단추를 하나하나 풀기 시작했다.
“잠깐만, 안에 들어가서 해도 되잖아. 다 왔는데 뭘 그렇게….” 날씨가 추워지는 탓에 속에 셔츠를 껴입어서 민망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유리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은하는 그러거나 말거나 단추를 다시 채운 뒤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별로 보기 좋지가 않아서. 기분 나빴으면 미안해….”
유리는 손을 내저었다.
“아냐, 기분 나빴다기보다는…오빤 그거 말도 안 해줬다는 거지? 나중에 뒈졌어.”
작은 웃음소리가 들리자 유리가 고개를 들었다. 은하가 웃고 있었다. 비웃는 것에 가깝긴 했지만. 유리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다시 은하의 표정이 굳었다.
“미안….” 은하가 말했다.
유리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니까. 오히려 고맙지.”
은하는 한참 동안 사과하듯 입을 다물고 있더니 기숙사로 들어갈 때가 되어서야 다시금 평소 모습으로 돌아왔다.
닫힌 문 너머로 하나씩 낙엽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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