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I가 교육을 바꿀 것이라는 말은 이제 새롭지 않다. 몇 년 전만 해도 그 말은 주로 실리콘밸리의 프레젠테이션 자료에서 나왔다. 그러나 지금은 교육부 정책 문서에 들어가 있고, 학교 이사회 회의록에 등장하며, 학부모 단체 채팅방에서 오간다. 논쟁의 무게중심이 ‘가능한가’에서 ‘어떻게’로 이동했다는 것은, 이 변화가 더 이상 미래의 이야기가 아님을 뜻한다.
논쟁은 그사이 더 정교해졌다. 초기의 단순한 낙관론—AI가 모든 학생에게 개인 교사를 붙여줄 것이라는—은 점차 분화되었다. AI 튜터가 실제로 학업 성취를 높인다는 연구가 나오는 한편, 그것이 학습의 피상적인 부분만 건드린다는 반론도 축적되었다. AI는 공감이 없다, 감정을 모른다, 지식의 잠정성을 이해하지 못한다, 진짜 교육은 인간만이 할 수 있다—이런 주장들이 힘을 얻었고, 그 결론은 대체로 예측 가능한 곳으로 수렴되었다. AI는 도구일 뿐이고, 결국 중요한 것은 인간 교사라는 것.
나는 이 결론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더 정확히는, 이 논쟁 전체가 가장 중요한 질문을 비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교육의 성과를 결정하는 가장 근본적인 변수는 동기다. 배우려는 의지, 모르는 것과 씨름하려는 충동, 틀렸을 때 다시 시도하려는 끈기. 이것이 없으면 최고의 교사도, 가장 정교한 AI도, 어떤 커리큘럼도 작동하지 않는다. 이것이 있으면 형편없는 교재와 과밀학급 속에서도 아이는 배운다. 이것은 교육학의 명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경험으로 아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AI 튜터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당연히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춰야 할 곳은 이 답이 아니라 다음 질문이다. 인간 교사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수천 년의 교육 역사가 대답한다. 아니다.
이것은 냉소가 아니다. 교육 역사를 통틀어 동기를 외부에서 만들어내려는 시도는 두 가지 방식으로만 작동해왔다. 공포와 유혹. 시험, 낙제, 사회적 실패에 대한 불안이 하나의 축이고, 칭찬과 보상과 경쟁에서의 우위가 다른 축이다. 인간 교사가 AI보다 이것을 더 잘하는 것은 사실이다. 교사는 학생의 표정을 읽고, 목소리의 떨림을 감지하고, 어떤 압력이 이 아이를 움직이는지를 파악한다. 그러나 이것을 동기 문제의 ‘해결’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것은 동기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동기 없는 행동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그 차이는 작지 않다.
소크라테스는 이 문제를 알고 있었다. 그의 산파술은 지식을 주입하는 대신 학습자 내부에 이미 있는 것을 끌어내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소크라테스 자신도 아테네의 법정에 섰다. 그가 청년들의 동기를 ‘잘못된 방향으로’ 깨웠다는 이유로. 동기를 일깨우는 일은 기술이 아니다. 재현 가능한 방법론이 아니다. 우리가 ‘훌륭한 교사’에 대해 이야기할 때 떠올리는 장면들—한 교사가 한 학생의 인생을 바꾼 이야기들—은 거의 예외 없이 특수한 관계와 우연한 맥락의 산물이다. 시스템이 아니라 기적이다. 기적은 정책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동기는 어디서 오는가.
목적의식에서 온다. 이것이 가장 정직한 답이다.
잘난 척하고 싶다는 욕망이든,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절박함이든, 위대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야망이든, 좋아하는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이든—공부를 열심히 한 사람들을 실제로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가 고상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역사적으로 가장 강렬한 학습 동기는 종종 가장 세속적인 욕망에서 나왔다. 과거 급제로 신분을 바꾸겠다는 조선 시대 평민의 의지,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 전문직으로 계층을 뛰어넘겠다는 집념, 내가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겠다는 오기. 이런 것들이 사람을 책상 앞에 앉혔다. 교사가 아니라.
이 관점에서 보면, 교육 제도가 해야 할 일이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동기를 ‘심어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자신만의 목적의식을 발견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 그런데 현대의 학교 제도, 특히 한국의 입시 시스템은 이 조건을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설계해놓았다. 모든 아이에게 동일한 목적—좋은 대학—을 부과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개인의 목적의식이 자랄 자리를 없애버린다. 천편일률적인 목표는 천편일률적인 무기력을 낳는다. 자신이 왜 이것을 배우는지 모르는 채로, 모두가 같은 방향으로 달리도록 강제된 아이들에게 내적 동기를 기대하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요구였다.
여기서 우리는 AI 튜터 논쟁의 진짜 맹점에 도달한다.
AI가 동기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비판은 옳다. 그러나 그 비판이 인간 교사라면 해결할 수 있다는 암묵적 전제를 깔고 있을 때, 그것은 진단을 호도한다. 교사도 동기를 만들지 못한다. 교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이미 목적의식을 가진 아이를 더 잘 도와주는 것이거나, 운이 좋을 때 어떤 아이 안에 잠들어 있던 욕망을 건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시스템의 성과가 아니라 우연의 선물이다.
진짜 물음은 ‘누가 동기 문제를 해결하는가’가 아니다. ‘우리는 왜 아이들에게서 목적의식이 자랄 기회를 빼앗는 시스템을 유지하는가’다.
이 질문 앞에서 AI 튜터 도입 논의는 너무 자주 시스템의 문제를 도구의 문제로 대체한다. 아이들이 배우려 하지 않는다면 더 좋은 도구를 주면 된다는 논리. 더 개인화되고, 더 반응적이고, 더 재미있는 도구를. 그러나 자신이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에게 더 좋은 침대를 주는 격이다. 문제는 도구가 아니라 방향이다. 그리고 방향은 도구가 줄 수 없다. 삶이 준다. 경험이 준다. 어떤 경우에는 실패가 준다. 혹은 깊이 원하는 무언가와의 만남이 준다.
그 만남을 어떻게 만들어줄 수 있는지, 나는 아직 모른다. 아마 누구도 확실히 알지 못할 것이다. 일 년 넘게 이어온 아이들과의 수학 모임에서 나는 가끔 그 만남의 순간을 목격한다. 문제를 풀었기 때문이 아니라, 문제가 이상하고 재미있어서 달려드는 아이. 그 아이 안에서 무언가가 켜지는 순간. 그러나 나는 그것을 내가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한 일은 점수를 매기지 않은 것, 틀렸을 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도록 한 것, 즉 목적의식을 획일화하는 압력을 그 공간에서만큼은 잠시 걷어낸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교육이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기여일지 모른다. 불을 켜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스스로 자신의 불을 찾을 때까지 아직 꺼지지 않도록 바람을 막아주는 것.
AI 튜터가 교육을 바꿀 것이라는 주장도, 인간 교사만이 진짜 교육을 할 수 있다는 주장도, 이 더 어렵고 더 불편한 질문을 회피하는 한 공허하다. 우리가 정말 물어야 할 것은 도구가 아니라 시스템이고, 시스템보다 앞서 아이들이 살아가는 삶의 결이다. 그리고 그 삶에 어떤 목적의식이 자랄 수 있는지는, AI도 교사도 아닌 우리 사회 전체가 어떤 인간을 가치 있다고 여기는가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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