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말고사가 끝난 뒤, 가을도 끝나고 완연한 겨울로 접어들었다. 하루하루가 흐르는 동안 은하는 거의 매일 유리와 함께 붙어 다녔다. 피치 못 할 사정에 의해 유리가 같이 다닐 수 없을 때에는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불안감에 도무지 집중을 할 수 없던 적도 있었다. 이 새로운 감정, 장난처럼 넘기기는 했어도 책에서나 읽어 보았던 감정에 혼란스러움을 떨쳐낼 수 없었다.
예전보다 일찍 일어나 머리나 옷차림을 조금이라도 더 다듬는 날이 늘어났다. 대화 주제에 한해서는 다른 세상에 있다고 해도 될 만큼 유리와의 접점이 없었기 때문에 주말에 억지로 시간을 내 가면서 그런 것들에 대해 ‘공부’를 했다.
억지로라도 미소를 짓는 날이 늘어났지만 실제로 기운이 나는 날은 드물었다. 심장의 두근거림이 줄어들었으면 하는 마음에 커피를 그만 마시게 되었다. 팍팍하지만 매일매일 망상일지도 모를 행복한 고민으로 가득 찬 하루하루가 흘렀다.
유리에게 지금 하는 것보다 더 깊은 스킨십을 하고 싶은 충동이 들 때도 있었다. 은하는 그런 짓을 하게 되는 자기 자신에게 이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상상할 때마다 견디기 힘든 행복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이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유리에게 털어놓고 싶었다. 궁극적으로는 그 때문에 유리와 가까워지기 위한 노력을 한 것이기도 했다.

며칠이 흘러 12월 중순, 첫눈인 진눈깨비가 몇 시간 만에 그친 날 저녁, 은하는 침대에 누워 있었다. 유리와 함께 더 많은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일이 어느새 부담이 되고 있었다. 더 이상 가까워지지 못 한다면 어째서 이러고 있는 걸까. 은하는 그렇게 생각하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전학 왔을 때로부터 3달이 흘렀지만 창백한 그 색깔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한숨을 내쉬던 그 때 문자가 왔다는 알림이 울렸다.
‘좀 괜찮아? 오늘 기운 없어 보였는데.’ 유리였다.
은하는 핸드폰 윗면으로 입술을 톡톡 두드리다가 답장을 보냈다.
‘괜찮아. 피곤해서 그래.’
‘정말? 너무 무리하는 거 아냐?’
‘너무 걱정 마. 내가 알아서 조절할 수 있어.’
‘알았어. 그럼 잘 자.’ 그 말을 끝으로 유리의 대답이 끊겼다.
은하는 핸드폰을 침대 구석에 던져 놓고 이불을 덮었다. 무리한다는 생각은 한 적 없었다. 그저 유리에게 잘 보이고 싶을 뿐이었다. 전학 왔을 때의 무력한 자신, 축제 때의 공포에 질린 자신의 모습을 더는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위안은 되지 않았다. 은하는 달력을 슬쩍 쳐다보았다. 오늘이 12월 10일. 그리고….
은하는 몸을 일으켰다. 이틀 뒤, 가야 할 곳이 있었다. 그리고 유리도 따라갔으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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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2일, 유리는 지하철 창밖을 내다보다가 은하를 돌아보았다. 은하는 시험 전에 보았던 ‘외출복’에 카디건 대신 검은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처럼 들뜬 표정이 아니다 보니, 그 옷차림의 은하는 오히려 평소보다 더욱 성숙하고 또한 어두워 보였다. 은하가 같이 가고 싶다고 얘기를 꺼냈을 때에도 그런 표정이었기에 유리는 차마 거절을 하지 못 했다. 물론 은하와 함께 하는 외출을 반기고 있기는 했다. 시험도 끝나 이제 완전한 학기말이고, 아이들은 다가오는 고등학교 3학년의 압박 속에서 반쯤은 광란에 물든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아마 이번을 마지막으로 대부분이 고개 팍 숙이고 공부를 하게 될 터였다. 유리는 다시 차창 밖을 내다보았다. 미래에 대해서는 생각해 둔 게 있었다. 평균대에 있어서는 나름 자신이 있었으니, 기왕 이렇게 된 거 더욱 발전시켜서 강사가 되는 건 어떨까 하던 중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지하철이 도시 외곽에서 멈췄다. 은하는 유리를 살짝 잡아끌며 내렸다.
뭔가 이상했다. 은하의 표정은 평소의 무표정보다도, 축제 때의 겁에 질린 모습보다도 더 긴장한 것 같았다. 거의 나무토막처럼 경직된 모습에 유리는 어디 가는 거냐고 넌지시 물었다. 은하는 땅을 바라보다 하늘을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납골당.”
그 한 단어는 허공을 맴돌다가,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유리는 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납골당이라면, 아마도 은하의 부모님을 뵈러 가는 것일 것이다. 은하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유골을 담은 서랍장이 잿빛 담장처럼 줄지어 서 있는 납골당 안을 돌아다니던 은하는 이윽고 멈춰 섰다.
고작 두 칸. 은하의 부모님이 거기 계셨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도.
“…이모도 오신 줄은 몰랐네요.”

그 두 칸 앞에 앉아 있던 여성은 고개를 들었다. 은하의 이모라는 그 사람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네가 온 게 더 놀랍네. 그런 차림도 하고.”
“바뀌더라고요, 살다 보니까.” 은하가 대답했다. 유리는 몇 발자국 떨어져 둘을 지켜보기로 했다. 둘 사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던 까닭도 있었다. 둘 모두 숨죽여 이야기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화는 희미하게 들렸다. 둘의 목소리에는 무언가를 참고 있다는 느낌도 섞여 있었다.
“이모는 매년 여기 오셨어요?”
“1년에 두 번. 한 번은 남편이랑 오고 오늘은…알지?”
“혼자 계시는 게 편하세요?”
“기일이랍시고 핑계 대면서 1년에 한 번씩 꼬박꼬박 눈물 보이는 게 싫어서.”
“…….”
“뒤에 애는 누구야, 친구?”
“네, 장유리라고 해요.”
은하의 이모는 유리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옷 예쁘네.”
유리는 털모자를 쓰고 회색 점퍼를 입은 채 검은 셔츠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유리는 자신의 옷이 뭐가 예쁜가 싶어 슬쩍 보았지만, 아무거나 골라 입은 것에 가까운 조합으로만 보였다. 은하와 은하의 이모 사이에도 침묵이 흘렀다. 갑자기, 은하가 질문을 던졌다. 방금 전까지와는 다르게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이모, 절 왜 버렸어요?”
“갑자기 그런 질문은 왜 해? 내가 널 왜 버리니?”
“억지로 전학 서류 만들어 놓고, 제 의사는 신경도 쓰지 않고 보냈잖아요, 그게 버린 게 아니면 뭐에요?”
“그때 말했잖아, 사람도 좀 만나고 그러라고. 계속 방 안에 틀어박혀 있으면 안 돼.”
“내가 방 안에 틀어박히게 만든 게 누군데? 나 볼 때마다 더러운 거 취급하듯이 눈 돌린 게 누군데!” 은하가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쌓여 있던 무언가가 터져 나온 것 같았다.
“그래, 눈 돌린 건 인정할게. 왜, 그게 그렇게 열 받았어?”
“씨발, 좆나 열 받았어! 이모는 날 키워 주기만 했지 나한테 애정은 주지도 않았잖아!”
“갑자기 욕은 왜 해? 내가 뭐 어떻게 해야 하니? 난 언니가 죽은 걸 가지고 기뻐한 줄 알아? 반쯤 불타서 오그라들어 있는 널 보는 게 얼마나 괴로웠는지 알아? 너한테 애정을 주고 싶어도 줄 수가 없어!”
이 한 마디가 은하의 말문을 막아 버렸다. 은하의 이모도 화가 난 건지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매일매일 네가 사고 때가 생각나서 우는 걸 보는 게 얼마나 아픈지 알기나 해? 난 이미 없는 언니를 잊으려고 하루하루 버티는데 넌 그걸 못 잊어서 안달이잖아! 그래서 더는 볼 일 없게 보내 버린 거야! 그때는 싫다 싫다만 하다가 이제 머리 좀 크니까 다른 말로 화낼 생각이 들어? 그렇게 잘났으면 그때 같이 죽었어야지!”
“둘 다 그만 해요! 돌아가신 분들 계시는 데에서 뭐 하는 거예요!” 보다 못 한 유리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은하의 얼굴은 눈물로 얼룩져 있었고 은하의 이모는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문질렀다. 둘 모두, 내버려 두었다면 멱살이라도 잡고 싸울 태세였다. 은하의 이모는 더 이상 처음 봤을 때의 조용조용한 태도를 유지하지 않았다. 거칠게 유리의 손을 뿌리치고 돌아가는 그녀를 쳐다보던 은하는 다시 은하의 부모님이 잠들어 있는 서랍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한동안 씩씩대던 은하는 이내 긴 한숨을 쉬었다.
“이모는…내가 죽는 게 더 나았나 봐.”
“화가 나서 그러셨을 거야. 너무 그렇게 생각 안 해도….”
“가끔 내가 자는 줄 알고 이모부한테 하소연하는 거 들은 적 있었어. 그때는 그냥 무시하려고 했는데…정말이었던 거야. 나…정말 버림받았어.”
은하는 웃고 있었다. 울지 못 해 웃고 있었다.
“이제 어떡하지?”
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이제 어떡하지? 이제 어떡하지? 그렇게 은하의 목소리만이 머릿속에서 맴돌 뿐이었다. 은하는 멍하니 부모님의 명패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유리가 따라오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역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돌아가는 동안 은하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유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몰라 은하를 쳐다보지도 못 하고 자꾸 여기저기 둘러보기만 했다. 그러다 납골당에 올 때처럼 창밖으로 시선이 옮겨 갔다. 은하의 부모님을 집어삼킨 화염은 아마 은하에게는 물론이고 은하의 모든 인간관계에도 흉터를 남긴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자신이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면서 상주고등학교에 전학 온 은하에게, 자신은 선생님의 부탁 때문에 친하게 지내는 척을 했었단 말인가? 유리는 죄책감이 온몸을 휘감는 것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은하에게 미안했다. 그깟 가식으로 은하와 어울리기 시작하는 게 아니었다. 은하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아픈 상처를 품고 있었다. 유리는 은하를 슬쩍 쳐다보았다. 은하는 이어폰도 주머니에 넣은 채였다. 눈빛에는 생기가 없었다. 자신 앞에 무엇이 지나가는지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유리는 그 모습을 보더니 손을 잡아 주었다. 은하는 꿈에서 깨어나듯 고개를 들더니, 유리를 바라보았다.
“미안해.” 유리의 말이었다.
은하는 고개를 저었다.
“미안해하지 마…그냥….” 그것으로 끝이었다. 은하는 학교로 돌아갈 때까지 다시금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리고 기숙사 방 앞에 도착하자 유리에게 말을 걸었다.
“잠깐만…내 방에 와 줘.”

은하의 방은…설명하기 어려웠다. ‘공허하다’는 말이 가장 적절한 것 같았다. 미처 풀지 못 한 짐, 어지럽게 널린 옷가지, 그와는 정반대로 가지런히 놓인 책. 은하는 방문을 잠그고 커튼을 쳤다. 유리는 그러거나 말거나 켜켜이 쌓여 있는 책을 들춰 보았다. ‘고독의 우물’이라는 제목의 책이 눈길을 끌었지만 유리는 뒤쪽에서의 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은하는 창문 앞에 서 있기만 할 뿐이었지만 유리가 책을 떨어트리게 만들 이유는 충분했다.
은하는 가느다란 양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와이셔츠의 단추를 하나하나 풀었다. 곧 하얀 헝겊에 불과한 셔츠가 바닥에 흘러내리고, 뒤이어 치마도, 속옷도 떨어졌다. 곧 은하는 양 손으로 알몸을 조금이나마 가린 채 유리를 바라보았다.
“은하야…?” 가까스로 충격을 억누른 유리의 입에서는 한 마디만이 새어나왔다. 그마저도 숨을 들이키느라 크게 나오지도 않았다. 하지만 고요한 방 안에서 그 말은 너무나도 컸고, 은하는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유리는 그 모습을 보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은하의 몸에 남은 자국이 눈을 사로잡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얼굴을 덮고 있는 화상 자국은 항상 목을 타고 교복 안으로 사라졌다. 그 아래는 궁금해 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흉터는 목을 타고 한쪽 가슴을 감싸고, 허리로, 그 아래로 오른쪽 허벅지에 이르러서야 사선을 그리며 끝을 맺었다.
“사고에 대해서 더 말 안 했었지? 그때…아빠가 창문을 열려고 했어. 2층이니까 그쪽으로 나가려고 했지. 근데…불길이 너무 세서 창틀을 잡을 수도 없었어. 엄마가 날 감싸고…나만은 살아야 한다고 했어. 기억할 수 있어. 거의 매일 밤마다 그 말만이 기억나. 엄마가 했던 다른 말은 기억나지 않고….”
은하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손끝도, 가냘픈 턱도 떨리고 있었다.
“옷이 타서 달라붙었는데 병원에서는 그걸 떼어 내기만 하고 자국은 없애지 못 했어. 입원해 있는 동안 병문안은 아무도 오지 않았고. 친척이라고는 날 보러 올 수 없을 만큼 바쁜 두 명 뿐이니까. 퇴원하고 나서…다시 집에 갔는데…그런데….” 은하의 목소리가 잠기기 시작했다. 곧 은하는 말을 이었지만 말보다는 흐느낌에 가까웠다.
“난…그때 이미 버림받은 거야. 전부 다…날 버렸어, 가족들도, 친척들도 모두…나 혼자라는 게 무서워…계속 무서웠어…난 이제 어떻게 해야 돼…? 응? 대답해 줘….”
은하는 눈물을 닦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유리를 끌어안았다. 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은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은하는 이윽고 유리의 셔츠를 천천히 벗기기 시작했다.
“잠깐만, 은하야?”
“너만큼은 안 돼…너만큼은 잃고 싶지 않아…날 버리지 마…그만하라고 하지 마…제발…가만히 있어….”
유리는 저항하지 않았다. 텅 빈 유리구슬 같은 은하의 눈빛 때문도, 옷을 찢어 버리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거친 은하의 손길 때문도 아니었다. 은하의 몸이 자신을 가볍게 밀어 침대에 오를 때도, 옷자락을 풀어헤치는 동안 입술이 겹치며 따뜻한 입김을 주고받을 때도, 의족을 풀어 침대 밖으로 던질 때도. 유리는 어느새 자기 자신을 잊어버린 느낌이었다. 그저 미친 듯이 서로를 갈구하는 개체들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더 이상 상처받고 웅크리고 있는 은하도, 사고를 딛고 일어나고 있는 유리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싶었다. 막연한 상상과는 다르게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너무나도 어려웠다. 등허리를 훑는 쾌감과 배 속을 휘젓는 것 같은 고통의 경계는 종잇장 하나 차이보다도 가늘고 그 사이를 너무나도 부드럽게 오가며 강렬한 여운을 남겼다. 하지만 아프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그것마저도 어떻게든 참으려 하면서 얼마나 오래 서로의 몸을 탐했던지, 어느새 시작처럼 갑작스럽게 그 절정이 찾아오고 그 한순간을 더 원한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사라져 버렸다. 그 여운이 아직 가시지 않은 유리는 숨을 몰아쉬며 은하를 끌어안았다. 서로의 입술은 귓가에 걸쳐져 있었다. 은하는 울고 있었다. 유리 역시 눈가가 젖어 있었다.
은하의 눈물이 유리의 쇄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차가웠다.
그날 밤의 일이 슬픈 일이었는지 기쁜 일이었는지는 모른다. 둘 모두 의식을 잃듯 잠들었고, 그저 달빛만이 둘을 지켜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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