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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은하는 언제나 그랬듯 일찍 일어났다. 카페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방에 돌아와 씻고 가방을 챙겨 교실로 향한다. 가방을 책상 옆에 놓고 잠시 책을 들여다보던 은하는 무심결에 손을 빤히 쳐다보았다. 익숙함과 어색함이 뒤섞인, 묘한 느낌이었다. 한편으로는 괜한 짓을 한 게 아닐까 하는 후회가 밀려들어왔다. 계속 방 안에 있었다면 지금처럼 불편하지도 않았을 텐데. 하지만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혼란이 다시금 부딪쳐 오자 결국 은하는 교실 바깥으로 나갔다가 수업이 시작되기 직전에야 들어왔다. 반 아이들이 은하를 슬쩍 쳐다보았다. 은하의 자리가 비어 있는 교실이 슬슬 익숙해지고 있었을 것이다. 유리는 손을 흔들어 주었지만 수경이는 눈길만 슥 주더니 고개를 돌려 버렸다. 자리에 앉자 유리가 말을 걸었다.
“오랜만에 보네.”
은하는 고개만 끄덕였다. 수경이 쪽을 돌아보던 유리가 뭐라 말을 하려 하자 은하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내가 얘기할게. 조금만 있다가.”
유리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 수업이 시작되었다.

점심시간, 은하는 수경이가 나가려는 것을 보고 얼른 다가가 말을 걸었다.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본 수경이는 겁에 질린 눈길로 입을 열었다.
“아, 은하야…음, 그게…아침에는 그….”
은하는 수경이가 애써 변명을 늘어놓길 기다리지 않았다. 먼저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화내서 미안해.”
수경이는 그 말에 굳어 버렸다. 그리고 머뭇머뭇 말을 늘어놓았다.
“잠깐만, 지금 네가 그 말을 하면 그…내가 잘못한 건데 내가 사과해야….”
“화낼 생각 없었어. 기분 나빴던 건 맞지만 그렇다고 이럴 생각은 없었어.”
유리는 어색한 사과와 같잖은 변명 사이에서 어느 틈에 뭘 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 하고 있었다. 갑자기, 수경이가 양 주먹을 꽉 쥐고 소리쳤다.
“내가 잘못한 거야! 내가 유리한테 말했어, 가 봐야 하는 거 아니냐고. 내가 충동질한 거라서 무서웠어. 네가 그렇게 나오지도 않고 큰일 낼까 봐 무서웠다고!”
“그랬던 거야?”
수경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은하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꼬더니 말했다.
“그럼…미안해, 걱정하게 해서.”
“네가 미안해 할 게 아니라니까! 내가 미안해 할 걸 왜 네가 사과하고 지랄이야….” 수경이는 말끝을 흐리더니, 이내 눈가를 훔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은하 역시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분명 혼자 울고 웃고, 한심한 건지 귀여운 건지는 모르지만 보기 썩 나쁜 광경은 아닐 것이다. 유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현이야 뭐 워낙 뒤끝이 없으니 별일 없겠지만, 아무래도 수경이가 걱정되었던 것이다.
물론 유리의 예상대로 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왜, 무릎 꿇고 절이라도 하려고? 괜찮아. 우리가 널 제대로 배려 못 한 거니까 그냥 다 털어 버려.”
“응, 고마워….” 은하는 학교에 나오지 않은 동안 현이 인화한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공황 발작을 불러일으킨 축제였지만, 은하는 그 사진에서만큼은 진심으로 행복해 보였다.

또 시간이 흘러 방과 후, 은하는 교무실에 불려갔다.
“다시 나와서 다행이야. 걱정 많이 했어.”
“죄송해요…그렇게 오래 빠질 생각은….”
“나왔으면 된 거야. 혹시 왜 그렇게 우울해졌었는지 알 수 있을까?”
이미 상담 선생님이나 보건실에서 연락을 받았으면서. 은하는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말씀드릴게요.”
은하의 안색이 급격히 창백해지는 것을 본 담임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은하는 교무실에서 도망치듯 나온 뒤 도서관으로 향했다.
예상대로, 유리는 언제나 그랬듯이 도서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은하는 잠깐 유리에게 다가가는 것을 망설였다. 꼬치꼬치 캐묻지는 않을까 무서웠다. 하지만 결정을 내리기 직전에 유리가 은하를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어…일찍 끝났네?”
“그럴 일이 있었어.” 유리는 땀을 닦은 뒤인지 타월을 목에 두르고 있었다.
“그럼, 카페라도…갈래? 오늘까지는 동아리 빠져도 될 것 같고….” 은하가 말했다.
“그럴까? 근데 샌드위치만으로 괜찮아?”
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괜찮아, 너야말로 운동 했는데….”
유리는 은하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점심 많이 먹어서 저녁은 조금 먹을 거야.”
은하가 알겠다고 대답한 뒤 둘은 카페로 향했다. 다시 학교에 나온 첫날이었지만 순식간에 모든 것들이 원래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것도 그 전보다 더 매끄럽게.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학교를 빠진 나날의 영향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랜만에 맞이한 하루 일정을 마친 뒤, 은하는 침대에 기진맥진한 채로 주저앉았다. 다리와 발은 물론이고 어깨와 머리까지 안 아픈 데가 없었다. 주말까지는 여전히 며칠 남았으니 바로 자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 코앞으로 다가온 시험까지 신경 써야 할 것도 지천에 널려 있었다. 억지로 몸을 일으킨 것이 현명한지는 몰랐지만 그래도 친구들이 다시 받아주어 다행이었다고, 아니, 정확히는 유리가 다시 받아 주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은하는 잠에 빠져들었다. 정말 간만에 찾아온, 제대로 된 잠이었다.

본격적인 시험 기간에 들어가자 자습으로 수업을 넘기는 과목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열심히 공부하라는 뜻이었고 대부분 따라 주기도 했다. 은하 역시 분위기에 쏠려 교과서라도 들여다보는 날이 많아졌다. 하지만 자신이 원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 시간만큼 은하는 다시금 축제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날짜를 세는 것도 그만두었다. 달력을 보는 것만으로도 버티기 힘들었다. 그저 하루하루, 하루하루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낼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런 생활의 구심점은 있었다. 아무래도 유리의 비중이 가장 컸다. 전학 온 뒤 처음으로 먼저 다가와 준 사람이었다. 선생님의 부탁이 있었던 일이었지만 기뻤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싶었다. 유리도, 수경이도, 현도 그것을 느끼게 해 줬다. 더군다나 유리는 자신이 화를 냈음에도 먼저 사과해 주었다. 그 사실이 너무 고마웠고 은하는 그 덕분에 다시 학교에 나오게 되었다. 사실상 상주고등학교에서의 생활은 처음부터 유리와 얽혀 있었다. 은하는 가만히 침대에 누워 생각에 잠겼다. 이번에는 자신이 먼저 유리에게 가 보는 것을 어떨까? 체조부의 있는 아이들이 이상하게 보지는 않을까? 아니, 애초에 그럴 필요가 있을까? 유리가 부담스러워 하지는 않을까? 은하는 질문에 질문을 거듭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유리는 자신을 반겨 줄 것이다. 진심이든 가식이든.
다음 날, 은하는 도서부 일을 재빨리 마무리하고 체조부 연습실 앞까지 가 보았지만 이내 조금 떨어진 기둥 뒤로 몸을 숨겼다. 연습이 끝났는지 유리는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모습은 자신 같은 사람이 끼어들 자리는 아닌 것 같았다. 은하는 주먹을 꾸욱 쥐었다. 어렵사리 결심을 내렸는데도 결국 내빼고 마는 자신이 한심했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아이들이 무더기로 빠져나온 뒤에야 유리가 걸어 나왔다. 은하는 기둥 뒤에서 나왔다. 유리가 금방 알아보고는 손을 흔들었다.
“일찍 끝났네?”
“응, 어쩌다 보니까…시간이 남더라고.”
“잘 됐네. 참, 뭐 하나 물어봐도 돼?”
“어떤?”
“나 시험 끝나고 생일이거든? 괜찮으면 같이….”
“놀자고?”
“응, 고딩이 이런 거 챙기는 거 좀 쪽팔리긴 한데, 그래도 생일이잖아. 밖에 나갈 생각은 없으니까 방에서 간단하게, 어때?”
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니까’같은 이유를 떠나서 유리의 초대라면 환영이었다. 자율학습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중에도 유리는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 했다. 당장은 시험이 우선이었지만 은하 역시 기대감에 잠을 이루기 힘들었다.

시험은 순식간에 다가오고 순식간에 끝났다. 유리는 마지막 과목의 시험지를 가방에 넣고 기숙사로 향했다. 은하는 기숙사 정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시험 잘 봤어?” 유리의 인사였다.
“그냥…열심히 했어, 아마도.” 은하가 대답했다. 적어도 중학교 때처럼 시험 중에 긴장으로 쓰러지거나 하는 일은 없었으니 다행이라고 할 만 했다.
“너는?” 유리는 은하의 질문에 비밀이라는 듯 손가락을 입술에 대었다.
은하는 유리 몰래 한숨을 내뱉었다. 쓰러지거나 공황 발작을 겪는 일은 없었지만 최선을 다한 결과는 그렇게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조금이라도 상태가 나아졌을 때 공부를 해 두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하며 은하는 유리와 헤어져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누워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수경이나 현이나 각자의 뒤풀이를 할 생각인 것 같았지만 은하는 그렇게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굳이 가고 싶지는 않았다. 노래방이라는 말에 귀가 솔깃했지만 대여섯 명이나 갈 것이라는 뒷말에 곧 관심을 잃어버렸다. 얼마나 그렇게 누워 있었는지, 몇 시간 동안 내리 음악을 듣자 귀가 아파 왔다. 그러는 동안 반쯤 졸고 있던 은하는 이어폰을 빼고 창문을 열었다. 자살을 막으려는 건지, 예산 문제였던 건지 창문은 겨우 공책 두 개만했다. 주황빛으로 지고 있는 태양과 구름 아래로 바람이 불어 왔다. 어느새 정점을 찍은 가을이 지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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