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가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기숙사에 살고 있으니 찾아가면 되는 일이었지만 은하는 문을 걸어 잠근 채 열지 않았다. 각종 추측이 무성했지만 이렇다 할 답은 나오지 않았다. 유리는 조금은 속상한 듯 은하의 빈자리를 쳐다보았다. 기나긴 수업 시간이 끝나자마자 수경이가 유리의 책상을 탕 쳤다.
“왜 집중을 안 하시는지 묻고 싶은데!” 수경이가 말했다.
유리는 한숨을 쉬었다.
“은하 말이야. 벌써 사흘째잖아, 축제 때부터.”
수경이는 “아.” 하고 중얼거리며 턱을 괴었다.
“왜 그런지는 알고?”
“단순히 무섭다고 사흘씩이나 결석하지는 않을 거야. 아니면….” 유리가 말했다. 수경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면?”
“그냥…아냐, 본인이 말하지도 않는데 추측할 수는 없지,” 맥 빠지는 마무리에 수경이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가서 물어볼까? 왜 그러는지?”
“글쎄….” 유리는 말꼬리를 흐렸다. 은하는 섬세한 아이였다. 괜히 건드리지 않는 게 낫지 않을까? 아니면 도와주는 게 나을까?
“현이랑 가 보자, 걔도 걱정 많이 하던데. 어려울 때 같이 있어 주는 게 친구라잖아.” 수경이의 말에 유리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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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는 사흘째 물만 마시고 있었다. 선생님들 몇몇이 매일 찾아왔다. 하루는 마스터키로 문을 열려 했지만 은하는 온몸으로 문을 막았다.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으면, 혼자 내버려 두었으면. 오늘도 침대 위에 웅크려 있었다. 새로운 환경이니 잔뜩 괴롭혀 주겠다고 자신감 넘치게 주장하는 긴장 탓에 쉽게 잊히지 않았다. 무슨 짓을 해도 어림없었다. 귀가 아파 오자 은하는 이어폰을 집어 던졌다. 엉망으로 흩어진 책 위에 이어폰이 떨어졌다.
가장 괴로운 것이라면 잠을 잘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수면제는 이 학교에 오기 한두 달 전에 다 떨어졌지만 이모는 더 사지 못 하게 했다. 덕분에 부작용이 줄어든 것은 다행이었지만 이제는 체력이 다 떨어져 기절하듯 몇 시간 동안 기절하듯 잠드는 것을 제외하고는 의식을 잃을 수조차 없었다. 노크 소리가 들리자 은하는 화들짝 놀라 문가로 갔다. 또 마스터키를 가져왔을까?
“은하야, 안에 있는 거 알아. 잠깐 문 좀 열어 볼래?” 유리의 목소리였다. 은하는 문에 기대어 섰다. 유리만큼은 오지 않기를 바랐는데, 그냥 가 줬으면.
“김은하, 무슨 일 있으면 말해야 알지. 괜찮으니까 말해 봐.”
“지난번에 그건 신경 쓰지 마, 잘 끝났으니까.” 이어 현과 수경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또 다시 노크.
“은하야? 정말 괜찮은 거 맞아?” 유리가 말했다.
은하는 문손잡이를 붙잡았다. 수경인지 현인지가 문손잡이를 비틀었다. 은하는 무의식적으로 문이 열리지 않게 붙들었다.
“김은하, 야! 안에 있지?” 수경이가 문을 두드리다가 멈췄다. 유리가 작은 목소리로 뭐라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은하는 문을 아주 살짝 열었다. 차라리 빨리 쫓아내야 할 것 같았다.
“왜 왔어…?”
“걱정되니까 왔지. 사흘이나 학교 빠졌잖아.” 수경이가 말했다.
“…그냥, 그럴 일이 있었어.”
“힘들면 말이라도 해 줬어야지. 정 힘들면 문자라도.” 현이 말했다. 적잖이 불만스럽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은하의 말에 셋 다 할 말을 잊어 버렸다. 은하는 다시 문을 닫으려는 듯 문고리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은하야, 일단 얘기라도 해 봐.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유리가 말했다.
은하는 유리를 쳐다보았다.
“…말하기 싫어.”
“그래도 말해야 알지, 그렇게 참고만 있지 말고 같이 해결하면 되잖아?” 수경이가 말했다.
“너희들은…이해 못 해.” 은하는 그렇게 말하며 문을 닫으려 했다. 친구들이라고 해도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 줄 리가 없다. 서서히 말라비틀어지는 기분, 기억의 파편이 머릿속을 찌르는 기분을 알기나 할까?
“야, 잠깐만! 최소한 이해할 기회라도 줘!” 수경이가 닫히던 문을 붙잡았다.
“은하야, 그렇게 숨어 있지 말고. 괜찮아, 우리는 널 도우려는 거야.” 유리가 말했다. 은하는 문을 닫으려 했지만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싫어…제발 가 줘. 괜찮으니까.”
차라리 이렇게라도 말하는 게 낫다. 괜찮다는 말로 돌려보낼 수 있다면.
“안 괜찮아 보이니까 그렇지! 잠깐이면 되니까 문 좀 열어 봐.” 수경이가 말했다. 슬슬 짜증이 난다는 어투였다. 은하는 온 힘을 다해 버텼지만 결국 문이 열리고 말았다.

“…….” 은하는 숨을 몰아쉬었다. 혼자 있고 싶은데 남을 들이고 만 자신에게도, 가 달라고 했는데도 억지로 들어온 셋에게도 화가 났다. 은하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셋 다 닥치고 나갔으면. 위로 따윈 필요 없으니 나가 버렸으면.
유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유리 역시 화가 나기 시작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선생님이 시켜서 시작한 일이었지만 솔직히 은하와 잘 맞는 점도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일까지 할 줄은 몰랐다.
“은하야. 그렇게 계속 버텨도 해결되는 건 없어. 괜히 선생님이 친하게 지내라고 했겠어? 이럴 때 도우라는 거잖아. 말해 봐, 들어줄게.”
은하는 고개를 들었다. 어렴풋이 설마 했던 생각이 현실이 되고, 그것이 충격이 되어 온몸에 부딪힌 기분이었다. 그렇구나, 유리는 자신이 맘에 든 것이 아니라 선생님이 시켜서 친구인 척 했던 거구나. 정말 방해만 되는, 귀찮은 존재였구나. 유리가 뭐라고 말했지만 은하의 비명에 묻히고 말았다.
“…내 방에서 나가…내 방에서 나가…! 내 방에서 나가!” 고함보다는 비명에 가까웠다.
“내가 그렇게 도움이 필요해 보여? 내가 길 잃은 개새끼인 줄 알아? 너희들이 뭔데 날 돕겠다는 거야, 날 알지도 못 하면서!”
“은하야, 진정해. 도우려고 했던….”
“누가 도와 달랬어? 내가 도움이 필요한 걸 모를 줄 알아? 너희들이 일깨워 줘야만 내가 알 것 같아? 날 이해하려는 노력이라도 했어? 내가 뭐라고 생각할지에 대한 건 신경도 쓰지 않잖아! 항상 모두가 그랬어! 날 보기만 해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으로 대하면서 뒤로는 귀찮다면서 욕을 쏟아 부었다고! 너희들도 다 똑같아, 그것들이랑 똑같다고! 이젠 다 싫어! 너희들도, 선생님도 싫어! 그 중에서도 내가 제일 싫어! 난 이미 나가라고 말 했어! 그러니까 당장 나가, 죽여 버리기 전에!”
유리는 입을 열었다가, 은하의 눈살에 어느새 문가까지 물러났다. 두 눈에 불이 붙은 것 같았다. 은하의 말 하나하나가 날카로운 쇠붙이로 쑤시는 것 같았다.
수경이는 이를 악물더니 조용히 말했다.
“그래, 기껏 도와주겠다고 하니까 필요 없어? 그럼 계속 혼자 그러고 있던가! 미친년도 아니고….” 수경이는 방에서 나가 버렸다. 혼자 복도를 달려가는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문이 닫히고, 은하는 너무나도 차갑게 느껴지는 철문에 기대었다. 문 너머로 현과 유리가 말다툼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둘 다 화가 많이 난 모양이었다.
둘을 화나게 만들었다. 도움을 원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혼자 있고 싶었다. 화를 낼 생각은 없었다. 기분이 나쁘기는 했지만 그런 반응을 보일 생각까지는 없었다. 은하는 침대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이불을 덮고 눈을 감았다. 평생 지르지 않던 소리를 질러 목이 아파왔다. 이대로 잠들면 다행이겠지만, 자신이 했던 말들이 가시처럼 찔려 왔다. 싫어, 싫어, 싫어.
이제 셋은 오지 않을 것이다. 쫓아내 버렸다. 여기까지 와서 겨우 마음을 트게 된 사람들이었는데. 은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 버렸다. 최악의 상태로 마주한 추석 연휴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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