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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지루하기 짝이 없는 훈화가 끝나자 사흘 동안 계속되는 축제가 시작되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사복을 입고 있었지만 은하는 교복 차림으로 기숙사 로비의 의자에 앉아 있었다. 뭘 먼저 하는 게 좋을까. 수경이는 축제 일정이 적힌 팸플릿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오전 오후 구분 없이 부스 활동, 저녁에는 체조부 공연이 있었다. 유리가 이 자리에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어? 너네 둘 뭐 하고 있냐?” 수경이의 어깨 너머로 팸플릿을 쳐다보던 은하는 고개를 들었다. 축제 사진이라도 찍으려는 건지 카메라를 목에 건 현이 로비로 막 들어오고 있었다.
“할 게 있을까 싶어서…축제는 처음이라.”
“뭐 하는 게 좋을까 고민하는 중이었어. 왜?” 수경이가 물었다.
“심심해서. 혼자 사진 찍으러 돌아다니려니까 귀찮아 죽겠어.”
“그럼 우리랑 같이 갈래?”
현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포장마차에서 때우는 점심 식사, 지난 학기에 있었던 행사를 담은 사진전, 몇몇 반 아이들이 준비한 부스. 수경이는 한 번 발동이 걸리자 멈추지 않는 기관차처럼 여기저기를 쏘다니기 시작했다. 별 말 없이 따라가면서 사진을 찍는 현과는 달리 은하는 오후가 중간쯤 지나자 기진맥진해 벤치에 주저앉았다. 다른 둘은 각자 커피 한 잔씩을 들고 은하의 옆에 앉았다.
“축제 어때?”
“모르겠어…잠깐 머리 좀 식혀도 될까?”
수경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은하는 숨을 내쉬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파랗다. 실 한두 가닥이 휘감긴 것처럼 하늘을 가로지르는 얄팍한 구름을 빼면 정말 숨이 막힐 정도로 푸르렀다. 이렇게 하루 종일 바쁘게 보낸 뒤 진이 빠져 늘어져 본 적은 처음이었다. 그만큼 무언가 느껴지는 게 있었다.
“활기차고, 사람 많고…. 좋은 거 같아.”
수경이는 거 봐라 하는 표정으로 웃었다. 둘이 그러거나 말거나 현은 카메라를 뚫어져라 바라보면서 지울 사진을 추려 내고 있었다.

유리는 평균대 위에서 한 바퀴를 돌았다. 리허설이지만 긴장의 끈을 놓지는 않았다. 사실 공연 자체를 썩 달갑게 여기지는 않았다. 체조부의 개설 목적은 재활 치료다. 공연 따위, 그저 보여주기 식일 뿐이었다. 어디 주간지에도 실리기라도 하겠지. ‘아름다운 도약’이지 않냐고. 자신을 그렇게 보는 것이 싫다. 외다리라고 해서 그것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싫었다. 유리가 목발을 유난히 싫어하는 이유였다. 리허설을 하는 중에 딴생각이 피어오르자 유리는 그렇게 생각하며 연습에 더욱 몰입했다. 비록 보여주기 식이라도 최선을 다하고 싶다. 더군다나 부상으로 쉬기까지 했으니 더욱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뭐 할까? 유리나 보러 가?” 저녁. 수경이가 식사를 마친 뒤 물었다.
“난 갈 거야. 넌?” 은하가 되물었다.
“가고는 싶은데…집에 가야 돼. 저기, 오늘은 니 방에서 자고 가면 안 돼? 유리 보고 싶은데.”
은하가 어깨를 움츠렸다.
“아, 그게…내 방은 좀…그….”
“그?”
“그런 게 있어, 그러니까….”
남을 들이기 껄끄러웠다. 친한 것과는 관계없이 누군가가 자신의 방에 들어오는 것이 불편했다. 이모도 은하와 함께 사는 중에도 서로의 방은 침범하지 않았었다. 눈에 두기 싫었던 것일 지도 모른다.
“그런 게 뭔지는 모르지만, 정 그러면 다른 애 방에서 잘게.” 수경이가 피식 웃었다. 은하는 무안한 척 말꼬리를 흐리며 사과했지만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노닥거리는 동안 공연 장소인 체육관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무대 위에 불이 들어오고, 차례차례 준비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사이 유리 역시 평균대에 올라섰다. 다른 아이들은 오고 가면서 얼굴만 겨우 아는 수준이었지만 유리는 달랐다. 익숙한 사람이라 그런 걸까? 동작 하나하나, 시시때때로 바뀌는 표정에 전부 감정이 실려 있는 것 같았다. 긴장, 열정, 집중. 은하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뱉었다. 아름답다. 불빛이 수놓은 매끈한 몸매, 살짝 무아지경에 빠진 얼굴, 부상이 무색하게 완벽하게만 보이는 동작 전부.
“수고 많았어.” 미리 말해 둔 친구의 방으로 올라간 수경이와 달리 은하는 밤이 짙게 깔린 기숙사 앞 풀밭에서 유리를 만났다. 유리는 피곤해 보였지만 미소를 잃지는 않았다.
“실수 많이 했는데 괜찮았어?”
“했었어? 난 몰랐는데….” 은하가 말꼬리를 흐리자 유리는 웃음을 터뜨렸다.
“모르면 됐어, 묻지 마.”
그리고 침묵. 통금 시간까지 30분 정도 남았으나 둘은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잘 지냈어?” 유리가 침묵을 깼다. 은하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축제도…나름 재밌는 거 같아.”
“다행이네, 사람 많은 거 싫어한다고 해서 축제도 별로 안 좋아할 줄 알았어.”
은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낯설고 무섭기까지 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인파 속을 다닐 때는 누군가 흉터를 보지나 않을까 손을 연신 얼굴에 올리고 있었다.
“내일은….”
이번엔 유리가 고개를 돌릴 차례였다.
“내일은 어떤 걸…주로 해?”
“글쎄, 별로 하는 건 없어. 오늘하고 비슷한데, 근처 사는 사람들이 좀 올 거야. 다른 거라고 해 봤자 연극이랑 불꽃놀이 정도?”
“그럼 넌?”
“나? 내일은 너랑 다닐까? 괜찮다면.”
은하는 황급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미소를 감추려는 것이 뻔히 보였다.
“괜찮아. 기대되네, 내일….”
유리는 기지개를 쭉 켜더니 기숙사로 발길을 옮겼다.
“다행이네, 슬슬 가자, 통금 걸리겠다.”
“응, 내일 봐.” 내일 보자는 단순한 말이 이렇게 기대될 수 있다는 걸 오랜만에 알게 된 것 같았다. 각자의 방에 들어간 뒤에도, 침대에 누운 뒤에도 기대는 가시지 않았다.

날이 밝았지만 은하는 평소보다 늦게 방에서 나서게 되었다. 전날에는 교복을 입었지만 처음으로 사귀게 된 친구들 모두와 하루를 보낼 것을 생각하니 왠지 다른 옷을 입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봤자 후드티 정도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색다른 모습이었다. 쉬는 날에 옷을 몇 벌 사 두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은하는 옷을 갈아입다 말고 멍하니 상념에 잠겼다.
신기했다. 새로운 장소에 오기 전에는 상상도 못 하는 일이었다. 이렇게 기대해도 되는 걸까?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한 적은 많았다. 앞에서는 웃으면서 이야기하고, 실컷 기대하게 만들어 놓고서는 뒤로 욕설을 내뱉으며 그 기대를 배신한 경험이 적을 리가 없었다. 이번에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전보다 더 큰 기대를 품고 있었다. 어째서인지 은하는 자신의 마음임에도 가늠할 수 없었다. 한순간의 상념을 깨고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은하야, 일어났어?”
은하는 문을 열었다. 유리가 미소를 지어 줬다. 흑백 줄무늬 셔츠와 청바지 차림이었다.
“안 추워?” 은하의 인사였다.
“괜찮은데? 추위 많이 타나 봐?”
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방 밖으로 나서며 문을 닫았다.

유리의 말마따나 축제의 둘째 날은 전날과 별다른 게 없었다. 다른 점이라면 학교가 있는 언덕 아래에 사는 사람들이 올라온 것과 부스 활동이 더 활발하다는 정도뿐이었다. 어김없이 주변의 시선이 찔려 오자 은하는 손을 얼굴로 올렸다. 할 수만 있다면 커다란 모자라도 쓰고 싶은 기분이었다. 유리는 그런 은하를 슬쩍 보더니 조금 사람이 적은 곳으로 가기로 했다. 인파 속에서 돌아다니는 것을 기대하고 있었기에 남몰래 한숨을 쉰 것은 덤이었다.
은하는 학교 뒤편의 벤치에 앉고 나서야 손을 내렸다. 유리는 은하 옆에 앉았다.
“피곤해?”
“조금. 미안해…너도 하고 싶은 거 있었을 텐데.” 은하가 말했다. 좌우지간 유리의 얼굴에서 귀찮아하는 기색을 읽은 모양이었다. 유리는 머쓱한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저기, 그….” 유리는 고개를 들었다. 은하는 한참을 우물쭈물하더니 말했다.
“그냥 신경 쓰이는 거지 다른 문제는 없어. 그러니까….”
“나도 신경 쓰지 말아 달라고?”
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원하는 데로 갈게. 어차피 잘 모르니까.”
유리는 피식 웃으며 일어났다.
“그럼 어디부터 갈까….”
은하는 손가락을 입술에 짚고 고민하는 유리를 쳐다보았다. 그래, 조금 불편해도 된다. 유리가 자신 때문에 부담 갖지 않고, 저렇게 기운찬 모습 그대로 있어 줬으면 했다. 불행히도 그 생각은 오후가 되자 흔들거리기 시작하더니 수경이와 현까지 합세한 저녁 식사까지 오자 송두리째 사라져 버렸다. 유리는 정말 기운차다 못 해 넘쳐흘렀다. 수경이와 친한 이유를 조금 알 것도 같았다. 은하는 식사를 마치자 반 탈진 상태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기뻤다. 이렇게 기뻐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은하는 학교 앞 벤치에 주저앉았다. 다른 셋은 은하 옆에 나란히 앉았다.
“아, 불꽃놀이 시작한다.” 현이 그렇게 말하며 카메라를 꺼내들었다. 땅에 반쯤 무릎은 꿇은 현은 은하와 유리, 수경이 셋의 사진을 찍었다.
“뭐야, 허락도 안 받고 찍어?” 수경이가 물었다.
“편집 연습하는 데 쓸 거야. 인화해 둘 테니까 갖고 싶으면 와서 가져가고.”
현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벤치에 앉았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형형색색의 불꽃이 하늘을 수놓았다. 은하는 문득 한기를 느꼈다. 잊고 있었다. 은하는 불꽃놀이를 질색했었다. 소리 때문이든 불꽃이라는 특성 때문이든 뭐든 간에.
“참, 곧 있으면 추석인데 다들 어디 가?” 수경이가 물었다. 그 말대로 축제가 끝나면 추석 연휴가 있었다. 그 뒤에 자리 잡은 시험이라는 복병 탓에 맘 편히 놀기는 힘들었지만.
“전라남도에 내려가. 친척 집이 거기 있어서.” 유리가 먼저였다.
“난 서울이라 하루만 갔다가 올 거야. 넌?” 현이 수경이에게 마주 질문을 던졌다.
“나? 춘천 갈 거야. 유리 넌 알지 않아?”
“알지, 뭐 먹은 얘기만 했잖아. 은하야, 넌 어디 가는 데 있어?”
은하는 고개를 홱 들었다.
“아, 그게….” 은하는 쉽사리 대답을 꺼내지 못 하고 어물거렸다. 그러는 동안 폭죽이 몇 번 터졌다.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 한 은하는 고개를 푹 숙였다. 가족. 더는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끌어내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런 얘기를 굳이 이 자리에서 꺼내야 할까?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까? 두 손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려 해도 누군가에게 잡힌 것처럼 고개가 들리지 않았다. 몽롱한 꿈과도 같은 빛이 스멀스멀 기어들어오고 있었다. 너무 오랫동안 대답이 없자 셋 모두 대충 분위기를 읽은 건지 입을 다물어 버렸다. 다른 쪽을 보고 있던 수경이와 현도 고개를 돌렸지만, 눈에 들어오는 것은 미동도 없이 고개를 숙인 은하뿐이었다.
“저, 은하야?” 유리가 은하의 어깨에 손을 짚으며 물었다. 은하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두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비명, 불, 몸을 감싸던 두 팔. 옷에 불이 붙던 느낌이 생생하다. 피부는 칼날이 파고드는 것처럼 아파 오고 매캐한 공기는 폐를 가득 채워 기침조차 막아 버린다. 주변의 비명이 점점 잦아든다. 사이렌 소리가 비명과 소방차가 내뿜는 물소리를 지워 준다. 아냐, 이건 현실이 아니다. 과거의 일이지 현실이 아니다. 그렇게 믿고 싶었지만, 고통, 열기, 비명, 모두 환상이지만 생생하게 날뛰고 있었다. 은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누군가의 손이 어깨를 붙들자 은하는 그제서야 고개를 들었다. 덕분에 주변을 집어삼키던 소리와 눈앞에 드리워진 잔영이 사라졌지만 더 이상 하늘에 떠 있지 않은 색채는 불꽃놀이가 끝났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온 몸은 땀에 젖어 있었다.
“은하야, 왜 그래? 괜찮아?” 유리가 물었다. 다분히 조심스러운 말투였다.
“괘, 괜찮아…그냥 그게…그냥….”
“그냥?”
“…아무것도 아냐. 나 먼저 들어갈게.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은하는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풀렸지만 은하는 그대로 기숙사로 향했다. 등 뒤에서 유리가 부르자 은하는 달리기 시작했다.
완전히 망쳐 버렸다. 어쩔 수 없이 과거의 기억이 돌아오는 일도 있을 것이라고 병원에서 말했었지만 기분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은하는 입술을 깨물었다. 갈수록 자괴감보다는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화를 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은하는 곧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기숙사로 향했다. 축제는 끝이다. 은하는 하루 종일 입고 다닌 후드티를 벗어 던졌다, 그저 옷일 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이제는 더러운 넝마 조각인 것 같았다. 은하는 침대 위에 몸을 웅크렸지만 눈을 감자마자 다시 기억이 날카롭게 머릿속을 찔러 왔다. 다시금 숨이 떨려오자 은하는 이불을 꽁꽁 싸맨 채 베개에 머리를 파묻었다. 차라리 이대로 죽었으면, 다시는 기억하지 못 하게 영원히 사라졌으면. 그렇게 되뇌면서 한동안 뒤척이고 나니 아침이었다. 은하는 멍한 눈길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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