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는 눈을 떴다. 방 안은 어두웠지만 시계를 보니 평소의 일어나는 때보다 1시간이나 일렀을 뿐 어쨌든 아침이었다. 유리는 불을 켜고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며 왜 자신이 알몸인지, 왜 혼자 은하의 방에 누워 있는 것인지 골똘히 생각했다. 곧바로 불과 몇 시간 전의 기억이 밀려오자 유리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평소의 이성이 아닌 한없이 육체적인 갈망으로 가득 찬, 그 기억과 분위기의 잔향에 유리는 황급히 씻고 옷을 입었다.
막 옷을 다 입었을 무렵 은하가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양 손에는 도시락이 담긴 검은색 비닐봉지가 있었다. 유리가 당황에서 벗어나 인사를 건넸지만 은하는 답을 하지 않았다. 둘은 그렇게 말없이 식사를 하고, 분명히 조금 뒤면 수경이가 올 거라 생각하며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모든 면에서 평범한 하루가 시작되었지만 유리는 도저히 집중을 할 수 없었다. 학기 말이라 서 망정이지 학기 중이었다면 별로 유쾌한 결과가 오진 않을 것이었다. 유리는 아침 내내 간밤의 단편적인 기억들을 돌아보았다. 은하의 두 팔, 간지러우면서도 아프던 접촉, 파르르 떨면서도 가까스로 평정을 유지하려 애쓰던 은하, 다른 쪽과는 다르게 살짝 어색하게 움찔거리던 화상 자국.
은하 역시 집중하기 어려운지 한 곳에 눈길을 고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리의 경우와는 다르게 은하의 얼굴에는 점차 두려움과 죄책감이 퍼져 나갔다. 보다 못 한 유리는 뭔가 말을 걸어 보려 했지만, 은하는 쉬는 시간이 시작하는 순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교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또 시작이냐는 의미 없는 푸념이 주변에서 흘러나왔다. 하지만 은하는 4교시가 끝날 무렵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유리는 점심시간이 되자 은하에게 문자를 보냈다. 곧바로 답장이 왔다.
‘미안, 바람 좀 쐬고 싶어서.’
‘무슨 일인지 말 해 줄 수 있어?’
답장은 거의 30분 동안이나 오지 않았다. 식사를 마치고서도 불안감에 휴대폰만 들여다보기를 얼마, 드디어 답장이 왔다.
‘지난번에 공원 기억해? 육교 옆에. 괜찮으면 거기서 보자.’
“수경아, 나 밖에 좀 나갔다 올게. 쌤한테 말 좀 해 줄래?”
수경이는 의심스럽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오늘 너희 둘 좀 이상한데. 은하한테 무슨 일 있어?”
“별 거 아냐. 금방 들어올게.”
교복을 입은 상태 그대로인 고등학생 둘이 가 봤자 어디로 갈까, 유리의 부모님은 차로 1시간은 가야 닿았고 은하의 유일한 친척은 이미 은하의 양육권을 거의 포기했다. 선생님도 그것을 모르는 바 아니었기에 외출증을 끊어 주었지만, 들어올 때 꼭 연락하라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은하의 소위 ‘외출’은 학교 내에서도 주시하는 사항이었지만 그렇다고 강제로 끌고 올 수는 없었다. 오래 걸리고 귀찮지만 유리처럼 은하와 친한 아이가 있어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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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는 차가운 벤치에 앉아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전날 밤, 자신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유리를 원했을 뿐이라고 변명할 일도 아니었다. 유리가 자신을 확실히 좋아하는지도 모르는데도, 대답을 듣지 않고 몸을 섞었다. 그 느낌을 떠올리자마자 은하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왜 유리와 친하게 지내려 한 거지? 그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남들이 몇 번이나 자신에게 그랬던 것처럼 쓰레기 내던지듯 버리려고? 유리를 생각할 때마다 드는 감정을 뭐라고 해야 할까? 이 무참하게 심장과 뼈를 도려내는 감각이 뭘까? 애초에 왜 유리를 납골당에 데려갔을까? 그냥 혼자 갔으면, 그럴 일도 없었을 텐데.
그날 아침, 은하는 깨어나자마자 공포에 휩싸였다. 자신이 했던 짓에 대한 자각이 날카롭게 온 몸을 꿰뚫어 그 때의 감각을 돌이키는 순간 은하는 옷을 챙겨 입고 방에서 뛰쳐나왔다.
간밤의 기억은 광기에 가까웠다. 모든 순간을 즐기면서 물리적으로 섞이기를 갈망하듯 서로를 더럽히고 상처 입히며 그저 쾌감이라는 달콤하고 일시적인 감각만을 원했다. 유리에게 다가가고 싶었다고, 아니, 굳이 다가가지 않더라도 유리가 어떻게든 자기 자신을 감싼 벽을 부숴 주기를 원했다. 그러면서도 그때의 순간적인 행복, 뜨겁게 달아오른 그 육감적인 행복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혼란스러운 소용돌이를 깬 것은 발소리였다. 눈을 들자 유리가 멀리서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유리가 은하를 부르자 은하는 천천히 일어섰다. 양 손을 맞잡고 한참이나 고개를 숙이고 있던 은하는 유리가 뭐라 말하려는 순간 입을 열었다.
“나…어제 그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유리는 그것 때문이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으면서도 대답을 망설였다.
“싫었지? 그거…나였으니까. 다른 사람이었어야 했는데.”
“무슨 말….”
“싫었잖아, 나 같은 게 너한테 그런 짓을 했는데 좋았을 리가 없잖아, 네가 날…나한테 호감 같은 걸 가지지 않았다는 거 알아.”
“잠깐만,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어제 그게 뭐가 어때서?”
“날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억지로 받아줬다는 거 알아. 내가 그런 걸 받을 자격 없다는 것도 알고…내가 다 망친 거지? 이제 겨우 조금 친해진 사이였는데….”
은하는, 차라리 유리가 여기서 자신이 싫다고 말하기를 바랐다. 그런 말을 다시 들었을 때 얼마나 상처를 받을지, 얼마나 많은 자책의 나날들을 보낼지 알면서도, 이렇게 괴롭고 혼란스럽다면 차라리 혼자가 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리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망치지 않았어. 난 어제 네가 상처받을까봐 억지로 한 게 아니니까. 정말로 네가 좋아서 한 거야.”
“거짓말….”
은하가 고개를 들었다. 분노인지 슬픔인지 모를 감정 탓에 흘러내린 눈물이 얼굴을 적시고 있었다.
“그렇게 말하지 마…그냥 내가 싫다고 해!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그것 때문에 또 상처받기는 싫어! 난…나 따윈 그냥 버려도 되잖아!” 은하가 말했다. 이제 은하의 한 마디 한 마디에는 혐오가 담겨 있었다. 자신을 향한 맹목적인 혐오가. 하지만 그 말에도 유리는 은하에게 한 발짝 다가갔다.
“미안해. 무리일지도 모르겠지만 난 버리고 싶지 않아. 좋아하니까.”
은하는 어찌할 줄 모른 채 흐느끼기 시작했다. 너무나도 고통스럽게, 차라리 그대로 내버려 두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럽게 둘 사이의 벽이 무너지고 있었다. 유리는 그 벽이 부서지는 속도만큼 천천히 다가가 은하를 살짝 끌어안았다.
그러자 은하는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울음이라는 범주를 벗어난 통곡이 터져 나오면서, 은하는 유리의 품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유리를 생각할 때 들던 이 감정, 줄어들 줄 모르는 이 감정을 이번에도 참고 넘길 수 없었다. 유리를 볼 때마다, 가까워질 때마다 점점 강해지기만 하던 이 감정에 은하는 이름을 붙였다.
“미안해…싫어해도 된다고 말해서 미안해…너한테만큼은 버려지고 싶지 않아…사랑해, 사랑하니까 제발…제발 버리지 마…!” 은하는 숨이 막혀 꺽꺽대면서도 유리를 감싼 팔을 풀지 않았다. 유리 역시 눈물이 고인 눈으로 은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괜찮아…울어도 되고 슬퍼해도 돼. 그렇다고 버리지 않을게, 너만큼은 절대로….” 유리가 말했다. 서로를 부서져라 껴안은 둘 위로 함박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올해 첫 함박눈이었다.

“은하야, 아파….” 유리가 중얼거렸다. 은하는 눈물도 나오지 않아 덜덜 떨면서도 팔을 풀어 주었다.
“미안…옷이 다 젖었네.” 은하가 말했다. 유리는 웃으며 은하의 손을 잡았다.
“진정되면 돌아가자. 오늘 하루쯤은 빠져도 되나 물어볼게.”
은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벤치에 앉았다. 유리 역시 따라 앉자 은하는 유리의 어깨에 몸을 기대었다. 몸이 떨리고 있었다. 유리는 급한 데로 입고 나온 코트를 걸쳐 주려 했지만 엉뚱하게도 본인이 기침을 내뱉고 말았다. 은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어가자…감기 걸리겠어. 옷도 갈아입어야 하고….”
둘은 학교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은하는 코를 훌쩍이며 유리와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마치 그곳에 있는지 확인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어느새 발밑에 푹신하게 깔린 눈이 카펫처럼 길을 내어 주고 있었다. 그 위로 눈이 사뿐사뿐 허공을 내딛었다.

은하는 돌아가는 동안 다시 입을 열기 시작했다. 은하의 가족을 집어삼킨 사고가 난 지 몇 달 뒤에 장례를 치렀지만 어린 은하는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 했다고 한다.
“그냥…믿기 싫었어. 그랬다는 게.”
자신을 보고 우는 이모와 다른 어른들을 보고서야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상처가 완전히 아물지 않아 붕대를 감은 얼굴이 눈물로 젖어들었다.
그때부터 반쯤 폐인이 될 때까지, 병원비를 감당하지 못 하자 억지로 퇴원할 때까지 은하는 겉으로는 조용히 지냈지만 괴로움을 없앨 방법을 찾아 나섰더랬다. 어차피 병실 안에서는 남는 게 시간이었으니.
책을 읽고, 음악을 모아 듣고, 이도저도 아니면 화장실 구석에 주저앉아 자위를 하고. 어떤 방법이든 한순간만 잊을 수 있을 뿐 그 여운이 가시고 나면 다시금 기억이 들러붙어 머릿속을 긁어 댔다. 처음엔 부모님의 영향을 받던 그 모든 것들은 점점 강도를 더해 갔다. 급기야 흉터를 쥐어뜯고 비명을 지르며 발작까지 하자 병원에서는 약을 처방하기 시작했다. 그 후 퇴원할 때까지의 은하는 약에 매여 있었다. 수면제 없이는 잠을 잘 수 없고, 진정제 없이는 마구 뛰는 심장을 억제할 수 없었다. 그렇게 모든 희망을 버린 채 상주고등학교로 억지로 전학을 오게 되었다고 했다.
“누가 나한테 다가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이렇게 될 것도 전혀….”
“그래?”
“응, 저기….” 은하는 발걸음을 멈췄다.
“나 사실 좀 무서워…이게 정말 널 향한 사랑이 아닐 거 같아서.”
유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의미야?”
“널 사랑하는 게 아니라 네가 애정을 주는 걸 사랑한 거면 어떡해? 내가 그쪽이 아니라거나 하면….”
유리는 피식 웃었다.
“너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고 있어.”
“내가?”
유리는 살짝 몸을 낮춰 은하를 마주보았다.
“그럴 땐 그냥 알려줘. 지금은 네 마음에 솔직하게 따르면 된다고 생각해. 네 마음은 어떤데, 지금?”
은하는 한참 동안 대답을 망설이더니, 숨을 길게 들이마시고 입을 열었다.
“지금은…널 사랑해.”
은하는 붉어진 얼굴을 돌리더니 중얼거렸다.
“충분해?”
“응, 충분해.”
유리는 조금 고민하더니 한 마디를 덧붙였다.
“나도 사랑해.”
은하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둘은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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