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에 글을 올릴 때 인터넷 이용자의 실명과 주민등록번호로 본인 확인 절차를 요구하던 때가 있었다. 2005년 선거법에 처음 도입된 인터넷 실명제다. 표현의 자유만 위축시킨다는 거센 비판 여론이 일었고, 결국 2012년에 헌법재판소가 위헌 결정을 내렸다.

뉴욕타임즈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반대 의견을 내거나 기업의 기밀을 폭로하려는 내부 고발자에게 익명은 필수적이라며, 당시 한국의 인터넷 실명제를 ‘형편없는(lousy) 아이디어’라고 조롱했다. 그 당시 세계는 소셜 미디어에서 새 희망을 보았다며 찬사를 쏟아냈다. 아랍의 봄 시위 확산의 일등공신으로 꼽혔고, 그 기저에 익명성과 개방성이 깔려있었다.

요즘은 분위기가 조금 바뀌었다. 편가르기와 증오를 부추긴다며 부작용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많다. 인터넷과 사이버 공간은 인종과 성별, 세대를 구분하지 않는 열린 문이었지만 이제는 빗장을 거는 사례가 늘고 있다. 안전과 위해성을 그 이유로 들고 있다. 뉴욕타임즈는 최근 ‘익명성은 끝인가? 인터넷 나이 제한이 강화되고 있다.(Anonymity no more? Age checks come to the Web)’는 기사를 실었다.

과거 사이버 공간의 항해는 거칠 게 없었다. 설사 성인용 콘텐츠라 하더라도 연령 제한을 피해갈 수 있는 편법이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정부나 인터넷 서비스 업체가 규제를 강화하는 게 세계적인 흐름이 되었다. 가장 큰 이유는 아이들에게 무방비로 노출된 위해성 때문이다.

일본에서 글로벌 소개팅 앱 틴더(Tinder) 이용자들은 나이를 증명할 수 있는 문서를 제출해야만 한다. 인기 온라인 게임 로블록스(Roblox)의 보이스 채팅에 참여하려면 정부가 발행한 신분증과 사진을 업로드해야 한다. 독일과 프랑스는 포르노 사이트 방문자들의 연령 체크를 법제화 했다.

미국도 예외가 아니다. 특히 페이스북이 청소년에게 해를 끼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내부 고발자의 폭로가 일파만파로 번졌다. 의회에서 청문회가 열렸고, 청소년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 움직임이 구체화 하고 있다. 뉴욕타임즈는 이런 일련의 흐름과 관련해 인터넷 사용이 익명의 광장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은행 일을 보러 가는 것처럼 되어가고 있다는 표현을 썼다. 신분을 밝혀야야만 하는 시대로 가고 있다는 것이다.

온라인 쇼핑, 스트리밍을 통한 음악 청취와 영화 감상, 커뮤니티 활동 등 인터넷이 일상 생활 전반을 점령하면서 익명성은 이제 옛말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스스로를 노출시키지 않으면 서비스에 접근하기 어려워졌다. 제공된 자신의 정보가 어디에 저장되고, 어떻게 유통되고, 이용되는지 가늠하기도, 추적하기도 벅찬 상황이 되었다.

AI 알고리즘과 더불어 사이버 공간이 미치는 해악이 예전보다 훨씬 커졌다는 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실명 강화나 나이 제한의 필요성을 뒷받침하는 논리다. 물론 여전히 반대의 목소리가 있다. 안전 문제를 이유로 내세워 이용자들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고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게 된다는 주장이다.

중국은 지난 8월 인터넷으로 연예인들의 인기 순위를 매기는 것을 금지했다. 연예인들의 온라인 팬클럽 운영도 규제하기 시작했다. 반정부적인 연예인들을 손보고, 청소년이나 젊은층이 연예인들에게 지나치게 매달리는 팬덤 문화를 차단하기 위한 강압적인 조치라는 분석이 많다. 온라인 게임을 영혼의 아편이라며 규제하기도 한다.

미국 버클리대학교 해니 파리드(Hany Farid) 공학 및 컴퓨터과학 교수는 뉴욕타임즈에 기술이 아이들에게 어떻게 해를 끼치는 지 알게 됨에 따라 앞으로 연령 제한과 규제는 더욱 강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규제 당국이나 인터넷 서비스 업체의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면서 “지금의 문제보다 더 해로운 해결책이 나오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청소년에 대한 안전 장치 강화를 주장해온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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