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Me To) 운동이 확산하면서 그 동안 쉬쉬하던 일부 문화 권력층의 감춰진 진면목이 여실히 드러났다.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유명 인사들이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저항하기 힘든 약자를 성적으로 괴롭히고 욕망의 대상으로 삼아온 사실이 알려지면서 세상이 떠들썩하다. 그런데 잘못을 시인하면서도 성관계에 강제성은 없었다는 해명이 세간의 분노를 더욱 키웠다. 피해자에 대한 또 다른 가해 행위이고, 사법 처리를 피하기 위한 꼼수라는 비난이 이어졌다.

성폭행이 사회 문제로 등장하고, 법적 공방으로 이어질 때마다 빠짐없이 등장하는 게 상대방의 ‘동의’ 여부다. 가해자는 피해자의 행동을 자의적으로 폭넓게 해석하면서 이것을 ‘동의’라고 주장할 때가 많다. 사실 제3자가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서로의 감정이 개입되는 은밀한 사생활인데다 쌍방간의 관계, 피해자가 당시 처한 상황 등 여러 요인을 복합적으로 고려해야만 한다.

워싱턴포스트와 미국의 카이저 가족재단(Kaiser Family Foundation)이 2015년에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는 ‘동의’에 대한 상반된 견해를 보여준다. 옷을 벗거나, 콘돔을 끼고,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다 진전된 관계를 인정하는 것이라는 응답이 40%였다. 하지만 그것이 성관계에 동의한다는 것은 아니라는 응답도 똑 같은 40%를 차지했다. 스웨덴은 법적인 해결책을 내놓았다. 명시적 ‘동의’를 구하지 않은 성관계는 모두 강간으로 간주한다는 형법 개정안이다. 성폭행 여부의 입증 책임을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에게 넘기겠다는 것이다.

자신의 감정과 본능에만 의존하는 일방적인 행위는 법적인 문제를 떠나 상대방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게 된다. 전세계적으로 성희롱이나 성추행, 성폭력의 잣대가 갈수록 엄격해지고 있다. 이런 추세는 분명한 의사 표시 확인의 필요성을 높였고, 어색한 그 절차를 디지털 방식으로 해결하는 방안이 나오기 시작했다. 스마트폰 앱을 통해 사전 ‘동의’ 절차를 거치게 함으로써 원치 않는 관계를 방지하고,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자는 것이다. 미국의 유에스에이 투데이는 ‘위 컨센트(We-Consent)’와 ‘사시(SaSie)’, ‘레갈플링(LegalFling)’이라는 3가지 스마트폰 앱을 소개했다.

‘위 컨센트’라는 앱은 아무리 친밀한 사이라도 상대방과 서로 대화를 통해 성관계 의사를 타진하게 하고, ‘Yes’와 ‘No’로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전할 수 있게 한다. 이런 내용은 암호로 저장되며, 사생활 침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개인 정보에 대한 보안을 강조한다. 아이폰에서만 작동하는 ‘사시’는 성희롱과 성폭행, 스토킹 예방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두 사람 사이에 ‘동의’가 있었는지 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개인 정보는 저장하지도 이용하지도 않는다고 강조한다.

‘레갈플링’의 기능도 다른 앱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지만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한 철저한 보안을 강조한다. ‘동의’는 일종의 계약이 되어 법적인 효력을 지니게 된다. 자신은 원하지 않는 상대방의 성적인 취향을 배제할 수도 있다. 법적인 문제가 발생할 경우에는 유료로 증거 자료를 제공하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하는 방안도 마련했다. 말로 하기 어려운 조건이나 요구를 앱으로 가능하게 함으로써 보다 안전한 관계를 가질 수 있다고 홍보한다.

서로 감정이 통하고 마음이 맞은 이들이 서로의 스마트폰을 꺼내 특정한 조건을 협의하고 ’동의’를 거치는 절차가 자연스러운 모습이 될 수 있을 지는 알 수 없다. 자칫 하룻밤의 상대를 찾기 위한 데이트 앱에 안전성만을 강화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올 수 있다. ‘동의’는 했지만 중도에 그만 두겠다는 의사 표시를 입증하는 것도 쉽지 않아 보인다. 특히 상대방이 위력을 행사해 강제로 ‘동의’하게 만들어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방안으로 ‘앱’을 역이용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시대의 변화는 더 이상 성적인 차별이나 폭력, 강압, 관행을 용납하지도 침묵하지도 않게 했다. 디지털은 이런 변화에 새로운 적용 방안을 만들어냈다. 인간의 은밀한 사생활까지 디지털 기술이 개입하는 세상에 대한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인쇄하기

이전
다음
1+

소요 사이트를 방문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액수에 관계없이 여러분의 관심과 후원이 소요 사이트를 유지하는 데 큰 힘이 됩니다. 후원금은 협동조합 소요 국민은행 037601-04-047794 계좌(아래 페이팔을 통한 신용카드결제로도 가능)로 후원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