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속의 보리밭

에세이 창작 수업에서 한 사람이 독후감을 써왔다.
글쓴이의 글과 책 속의 글들이 혼재돼 있었다.
인용했다는 따옴표도 전혀 되어 있지 않은 글에서 원 작가의 글들을 찾아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인용한 글들의 사고가 글쓴이의 사고와 다르기 때문이다.
독후감 쓰기는 쉽지 않다.
한 권을 읽고 그 책의 내용과 소감을 원고지 10장 내외로 정리하는 일이 쉬울 수는 없다.
독후감을 쓰기 위해서는 그 책을 내가 소화해야 한다.
그리고 나만의 문투로 내가 그 책에서 받은 느낌을 이야기해야 한다.
책을 읽는 동안 작가가 말하는 것을 깊게 따라가지 않으면 독후감이 불가능하다.
독후감을 쓸 때 원 작가의 글을 인용할 때는 반드시 따옴표를 해야 한다.
독후감이 아니라 어떤 글에서도 마찬가지다.
인용했다는 표시를 어떻게 해서든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내 글에 슬쩍슬쩍 들여놓게 되면 나도 모르게 그 글을 표절하는 것이 된다.
그러다 습관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글을 본인이 쓴 글로 착각하게 된다.
글을 쓰다 보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좋은 문장이 튀어나올 수도 있다.
시간이 지나면 책 속에서 갖다 놓은 글들이 내 글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이유다.
아무도 모르겠지.
사실 아무도 모를 수도 있다.
나도 모르는데.
다행히 수업을 듣는 친구는 배우는 중이므로, 지금 배우면 된다.
미처 배우지 못하고 유명해진 경우도 있다.

첫 책(에세이)이 제법 잘 팔린 작가가 있다.
그러자 이곳저곳에서 출판 제의가 들어왔고 지금은 꽤 여러 권의 책을 썼다.
나는 그러나 그 친구의 현란한 문장이 읽기가 불편해 첫 책만 읽고 읽지 않는다.
어느 날 좋은 소설을 쓰는 후배가 사무실로 놀러와 책상에 있던 그 친구의 책을 보고 말했다.
“이 사람 가짜예요.”
나는 깜짝 놀랐다.
그 후배는, 내가 아는 한 아주 깊이 있고 진정성 있는 친구.
그런데 그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듣는 내가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사람들이 잘 읽지 않는 아주 이상한 책의 문장들을 갖고 와 자기 문투로 글을 써요.”
그 작가의 책을 편집한 편집자로부터 들은 이야기란다.
책을 편집하다 보면 작가의 원고를 이리저리 확인할 수밖에 없다.
(글은 작가가 쓰지만, 책을 만드는 것은 편집자다!)
중간에 책 이야기가 나오면 편집자가 책을 찾아봐야 했을 것이고, 그 책들을 꼼꼼히 살펴봤을 것이다.
그러니 글의 내밀한 면을 발견할 수밖에.

좀 유명한, 아주 뛰어난 시인이 있다.
상도 많이 받았다.
그의 시를 나도 좋아했다.
어느 날 한 선생과 이야기를 나누다 그 시인 이야기가 나왔다.
“걔 가짜야!”
시를 가르치기도 하고, 누구보다 열심히 시를 읽고 쓰는 선생이었다.
그가 남의 것을 교묘하게 자기 것으로 바꾸는 재주가 뛰어나다며 혹평했다.
결국 그는 다른 사람의 글을 자기 것인 양 발표했다 문제가 됐다.

좋은 글을 쓰고 싶다.
그러나 좋은 글을 쓰는 것은 쉽지 않다.
살아내는 일처럼 매일 뚜벅뚜벅, 써야 한다.
그러나 절체절명이 아닌 만큼 뚜벅뚜벅, 쓰지 않고 결과물만 바란다.


[출처] 글쓰기에 대한 생각|작성자 생각을담는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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