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준군은 고등학교 1학년입니다. 글 쓰는 것을 배우지 않았지만, 내면의 소리를 소설로 풀어내는 용기가 있습니다. 훗날 그가 훌륭한 작가가 되었을 때 그의 글을 읽어준 소요 조합원을 생각해주기를 기대하면서 이 글을 게재합니다.”
1 – Child in time
“인간의 두뇌를 전자화시키는 ‘마인드맵 소프트웨어’ 기술의 개발, 지속적인 세포 배양과 골격 구조 개선을 통해 완벽하게 인간과 동일하게 개발된 로봇, ‘자율사고형 안드로이드’ 가 처음 세상에 선보인 지 3년이 흘렀습니다. 정부의 적극적인 정책과 함께 그들은 우리 생활의 일부로 자리 잡았지만, 끊일 줄 모르는 증오범죄와 일자리 논란, 위험성에 대한 논란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뉴스는 끝없이 암울한 내용만을 송출해야 하는 규칙이라도 있는 모양이다. 지하철은 매끄러운 소음을 듣기 좋게 흘리며 조용히 흘러가지만, 이어폰을 통해 전해져 오는 기타 리프에 묻혀 들리지 않는다. 2067년 5월 13일, 비가 심하게 내리던 날이었다.
“오늘부터 전학 오게 되었습니다. 김은하…라고 합니다.”
상투적인 소개, 틀에 박힌 박수소리, 경멸 반 억지 미소 반이 섞인 환영인사.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는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창가의 빈자리에 앉자마자 수업이 시작되었지만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의 시선이 바늘로 찌르듯 전해져 온다. 나의 얼굴 반쪽에, 콘크리트처럼 갈라져 시뻘건 속살을 드러낸 내 반쪽에.
시각장애를 가진 안드로이드. 좀 어색하죠? 앞이 보이지 않아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저의 마인드맵 소프트웨어는 혼란을 겪기 시작합니다. 물론 제가 안드로이드가 되기 전에도 시각장애인이었냐면…….맞습니다. 처음으로 전자화를 마치고 카메라를 연결하자마자 제 마인드맵이 오류를 일으켰고, 결국 계속 시각장애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죠.
정부에서 시행한 의무 교육 정책 덕에 저는 다시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앞은 보이지 않지만 다행히 아이들은 절 받아들어 주었고, 그렇게 오늘이 된 거죠. 아, 제 소개가 없다고요? 저는 KR3.91 자율행동형 안드로이드 장유리라고 합니다. 그냥 장유리라고 불러 주셔도 괜찮아요.
오늘은 전학생이 온 것 같았습니다. 작고 여리지만 마냥 약해 보이지는 않은 목소리. 하지만 왠지 우울하게 들리는 목소리였습니다. 비가 와서 기운이 없는 걸까요, 하루빨리 밝은 모습을 보여 줬으면 하네요.
별다를 것 없는 일주일이 지났다. 학교의 구조는 여느 고등학교와 다를 바 없었고, 중간고사도 끝난 뒤라 대부분의 아이들은 곧 있을 축제에 들떠 있었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지만.
오히려 다른 아이들은 최대한 나와 거리를 두려고 하는 것 같았다. 아무도 말을 걸지 않고, 눈길도 주지 않으려 한다. 물론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결과다. 딱히 기분 나쁘지도 않고, 나도 똑같이 무시하면 된다. 이대로 조용히 적응해서, 문제 일으키지 않고 살면 되는 것이다.
선생님의 추천으로 지하철 대신 버스를 이용하게 되었다.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길 원했던 걸까, 아니면 지하철에 타는 사람들이 날 보고 어떻게 반응할지 몰라서 그들과 떼어 놓은 걸까?
“김은하, 미안한데 좀 비켜 줘.”
선생님의 의도를 파악하는 질문을 한창 생각하던 중, 교실에서 내 옆자리에 앉는 아이가 말했다. 꽤나 크게 말해서 이어폰을 낀 상태로도 들릴 정도였지만, 나는 들리지 않는 척 하면서 창밖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김은하! 안 들려? 그거 좀 빼고 들어 봐!”
목소리에 날이 서 있다. 오늘은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며 시작한 하루였지만 예상대로는 되지 않았다. 이어폰을 빼자마자 그 아이는 친구와 같이 타고 싶으니 비켜 달라고 부탁했다. 아니, 명령했다?
“……”
굳이 말 할 필요도 없다. 버스는 이미 출발한 뒤였지만 조심해서 일어난 뒤 비어 있는 자리로 옮겼다.
김은하라는 아이, 아무래도 전학 오게 된 첫날만 우울했던 게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아이들과는 아무런 이야기도 안 하고, 항상 혼자 지낸다는 이야기는 선생님께 들었지만, 얼마나 심한지는 모르겠네요. 물론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죠. 얼굴을 간질이는 산들바람, 멍하니 울리는 기계음, 각자 가지고 있는 사연…….아이들 사이에서 ‘비공식 상담 선생님’ 으로 알려진 저는 점심시간마다 이 교실에 앉아 있는 게 일상이 되었습니다. 물론 도움이 많이 되죠. 하루에 쏟아지는 방대한 양의 정보를 자기 전에 전부 처리하기는 힘들었으니까요. 그날 역시 그 교실에 있었지만, 오늘 제가 듣게 된 이야기는 조금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들었습니다. 낡은 철문이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냈고, 곧이어 발소리와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아…도서관이 아니었구나, 혹시 어딘지…”
은하였습니다.
도서관을 찾아 가려다 길을 잃어버렸다. 친척들이 사는 빌라 대신 가까운 곳에 자취를 하게 되어 새 책을 구할 길이 없던 나에게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가능하면 넓고 조용한 곳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던 중 모르는 길로 들어서 버린 것이다. 거기다가 이 복도의 구조는 여느 교실이 있는 복도와는 다르게, 새로 페인트칠을 한 듯 한 분위기를 풍겼다. 심지어 어떤 교실인지 알려 주는 표시마저도 없었다. 어떡해야 할지 몰라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하는 심장을 겨우 진정시키며 나아가던 중, 역시 아무런 표시도 없지만 문이 아주 조금 열려 있는 한 교실 앞에 다다르게 되었다. 물론 도서관의 문이 유리가 아니라면 조금 열려 있을 수도 있지만…혹시라도 인기척이 느껴지면 바로 문을 닫을 생각으로 조심스럽게 밀었다. 하지만, 그 안은 도서관도, 평범한 교실도 아니었다. 아무런 인기척도 없는 교실 안에는 한 아이가 단정하게 묶은 머리카락을 산들바람에 맡긴 채로 앉아 있었다. 나처럼 전학생은 아닌 것 같았지만, 어쩐지 거리감이 드는 아이었다.
“네가 김은하구나, 만나서 반가워.”
한가롭게 인사를 나누기엔 조금 맞지 않는 타이밍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아이는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조금 시간이 지나서야 말을 시작했다. 눈을 지그시 감은 채로, 마치 나의 기척을 읽는 듯이.
“저기…혹시 누구…”
“아, 아직 얼굴을 다 외우지는 못했겠구나. 너랑 같은 반, 장유리라고 해.”
장유리. 알 것 같았다. 항상 교실 뒤편에서 점자책을 쥐고 있는, 쉬는 시간마다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그래, 어딜 가나 한두 명은 있는 사람이다.
“나한테 무슨…볼일이라도…”
“그냥, 혹시 내가 방해한 건 아니지?”
방해받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다. 상담은 내일이고, 하루쯤 도서관을 가지 않는다고 심각한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장유리라고 했던 그 아이를 방해하지나 않았을까 걱정되었다. 유리는 괜찮다면 차라도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어떨까 물어보았고, 나는 동의의 표시로 맞은편에 앉았다.
은하는 정말 독특한 아이였습니다. 제가 보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손을 얼굴 쪽으로 올렸고, 제가 말을 걸 때마다 숨을 들이키며 당황하고… 은하의 상처에 대한 이야기는, 저는 애초에 신경 쓰지 않는 항목입니다. 아이들에게 들은 소문, 화재로 가족을 잃었다거나, 몸 절반에 큰 화상을 입어 흉이 졌는데, 치료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거나. 그런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다니는 것이 필요한 건 아니니까요. 대화를 별로 하기 싫은 걸까, 은하는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습니다. 20분이 지나고, 점심시간이 끝나기 10분 전이었습니다.
“앞이 안 보이는…거야?”
“응, 어릴 때부터 안 보였어.”
“불편하지 않아…?”
난감한 질문이네요. 제 마인드맵이 고민을 싫어하는 탓인지 조금은 과부하가 걸릴 것 같기도 합니다.
“앞이 보인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는걸…궁금하기는 하지만.”
은하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의자를 끄는 소리도,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단지 나지막한 숨소리와 이따금 고개를 돌리며 머리카락이 옷깃을 스치는 소리뿐.
“저기…장유리.”
종이 울려서 교실로 가려던 참에, 은하가 말을 걸었습니다. 방금 전보다는 목소리가 조금 더 크고 명확했습니다.
“괜찮다면 여기…내일도 와도 될까?”
2 – Into the fire
축제 시작까지 사흘 남았다. 장유리와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눈 지는 이틀이 지났다. 어제도 그 교실에서 장유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유리는…앞이 보이지 않는데도 거의 모든 일을 평범하게 처리했다. 우리가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처음의 불안은 거의 사라졌고, 신나게 축제의 내용을 설파하는 유리 앞에서 나 역시 어느 정도는 들뜬 마음으로 축제를 기다리게 되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도서관에 가는 것도 일상이 되었고…아무리 평범한 장소라도 언젠가는 정이 가게 되기 마련이다. 큰 사건 없이 10일, 축제가 끝나면 2주를 지내는 것이 된다. 반 아이들은 어쩌다 일을 같이 하지 않을 때가 아니면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했다. 물론, 어느 정도는 예상한 결과였다. 그와는 별개로, 유리는 계획을 짜거나 머리를 써야 하는 일에서 빠질 수 없는 존재였다.
“은하야, 와서 이거 좀 도와 줘.”
며칠 전에 버스에서 비키라고 했던 수경이다. 잠시 딴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돌리자 수경이는 척 봐도 무거워 보이는 상자 옆에서 책상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지난번에 비키라고 했던 건 미안해. 좀 신경질 나기도 했거든. 알잖아, 그거…”
“알아. 사과 안 해도 괜찮아.”
“근데, 넌 왜 계속 혼자 다니는 거야?”
상자는 생각대로 심각하게 무거웠다. 둘이 들어도 벅찬 마당에 수경이가 계속 말을 걸자 금방이라도 놓칠 것만 같았다.
“이유…묻는 거야?”
수경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속사포처럼 말을 이어 갔다.
“밥 먹을 때도 그렇고, 쉬는 시간에도 그렇고. 집에 갈 때도 혼자 다니잖아. 이유라도 있는 거야?”
진심으로 묻는 걸까? 놀리려고 하는 말인지 진심으로 묻는 건지 생각하기에도 벅차다.
나는 아직 수경이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수경이 역시 대답을 굳이 들으려 하지는 않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질문은 끊임없이 날 따라다니고 있었다. ‘혼자’ 라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것에 이유가 있는 것일까? 겨우 상자를 옮긴 뒤 돌아가는 길에서도 그 생각은 아직 가시지 않았다.
“아, 장유리! 너 어제 말도 안 하고 사라졌더라?”
수경이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고개를 들자, 몇 시간 전부터 서 있었을 것처럼 창문을 향한 유리가 우리 쪽을 정확하게 향했다.
“수경이니? 어젠 미안했어.”
“아냐,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뭐.”
아까의 질문이 머릿속을 계속 맴돈다.
내가 혼자인 게 잘못인 걸까?
“참, 준비는 잘 되 가?”
남들은 나와 같이 있을 때도 날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나도 그러는 편이 좋아서 항상 혼자였다.
“응, 그렇긴 한데…재료가 좀 부족해서 걱정이야. 따로 사올 사람도 없고…”
“저, 저기…”
갑자기 내가 대화에 끼어들자, 둘 모두 내가 있었는지도 몰랐다는 표정으로 나를 향했다. 내가 평소에 어떤 취급을 받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익숙하지 않았다.
“왜?”
말을 이을 수가 없다. 순식간에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었고, 그 속을 검은 그림자가 덮기 시작했다. 나는 평소에도 이런 취급을 받았다. 나는 남들에게 없어도 그만인 존재인 것이었다. 아무리 내가 가치 있는 인간이라도 어쩔 수 없다. 나는 남들에게 필요 없는 존재이다. 아무도 날 필요로 하지 않는다. 수경이의 시선과 정면으로 부딪힌 순간, 끝없는 공포가 날 집어삼킨다. 온 몸이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뒤돌아서 달리기 시작했다. 나를 둘러싼 시선이 바늘처럼 꽂혀 온다. 계단에서 미끄러질 뻔 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축제가 시작되었습니다. 다른 날과는 판이하게 다른, 붕 뜬 분위기네요. 절로 미소를 짓게 만드는, 기분 좋게 바람이 부는 날입니다.
“김은하? 5번 김은하 안 왔니?”
그것과는 반대로, 평소에 제일 시끄럽던 저희 반은 오히려 조금 더 조용했습니다. 은하는 사흘 전 도망친 이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선생님들 몇 분이 가 보았지만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은하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수경이 역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고 있었습니다.
불안한 하루가 지나가고, 저와 수경이는 교실에 남아 있었습니다. 수경이의 말에 의하면, 은하는 도망치기 직전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고 했습니다. 어느새 제 마인드맵은 과부하를 막기 위해 입을 다물어 버렸고, 수경이는 답답한 마음에 쥐고 있던 샤프로 책상을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라? 안 가고 뭐해?”
담임 선생님의 목소리였습니다.
“쌤, 쌤! 혹시 은하 어디 사는지 아세요?”
수경이가 완전히 겁에 질린 목소리로 선생님께 하소연하는 목소리를 듣자 제 마인드맵 깊은 곳에서도 슬그머니 걱정이 솟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자세한 것은 은하와 더 이야기를 나눠 봐야 아는 일이겠지만요.
저녁 5시 30분. 수경이와 같이 은하가 자취 생활을 하고 있는 방에 도착했습니다. 개방된 구조인 덕분에 문을 열자마자 바람이 들어오기는 하지만, 오히려 이런 계절에는 풀벌레 소리 탓에 더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노크라도 해볼까? 열어 주려나 모르겠네…”
수경이가 살며시 문을 두드렸지만, 은하의 집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저 문이 공허하게 울리기만 했을 뿐. 수경이가 몇 번 더 두드렸지만 결과는 같았습니다. 그 순간…
“문…안 잠겨 있네?”
저는 물론이고, 수경이 역시 꽤나 당황스러운 목소리였습니다. 학교에서는 지나칠 정도로 꼼꼼하게 굴던 은하가 문을 잠그지 않았다?
“은하야, 들어갈게.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수경이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나 봅니다. 생각보다 훨씬 커다란 금속음이 거칠게 울렸지만, 여전히 집주인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집의 깊숙한 곳에서 나지막이 들려오는 훌쩍임이 전부였습니다.
사흘간 학교에 나가지 않으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왜 그 둘 사이에 끼어든 것이 날 이렇게 만들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둘 앞에서 검붉은 화염이 나를 집어삼키는 것 같았고, 난 그대로 집까지 뛰어 갔다. 아니, 도망쳤다.
오늘도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이런 나 자신이 한심하다고 생각하며 침대에 쓰러지듯 누워 있던 중, 그 둘이 찾아와 버렸다. 아무 생각 없이 열어둔 문, 선생님들이 완전히 간 게 맞나 확인하던 중 그냥 열어두었던 것 같았다. 남들이 나의 집을 보는 건 싫다. 둘이 날 부를 때 가서 문을 잠갔어야 했는데. 어쨌든, 유리와 수경이를 다시 보고 처음으로 내가 한 말은, 왜 왔냐는 말이었다.
“왜냐니, 우린 그냥 걱정되서…”
걱정. 걱정하고 있었다. 내가 둘을 걱정시킨 것이었다.
“나, 난 괜찮아…이젠 괜찮으니까 오늘은…”
말을 더는 이을 수 없었다. 다시 눈물이 나기 시작했고, 내가 아무리 빠르게 이불을 끌어올려도 둘은 나의 눈물을 봤을 것이다. 아니, ‘본’ 사람은 한 명일까.
“은하야…”
유리가 나지막하게 불렀고,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둘을 내치기 싫다. 하지만 이런 나의 모습을 보여 주기도 싫다. 아무리 둘을 잃기 싫더라도, 제발 가줬으면 한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말을 할 수가 없다. 눈을 뜨자 사방에 퍼진 그을음이 날 맞이했기 때문에.
“은하야?”
웅웅거리는 소리가 귀를 때리고 있다. 둘은 입도 뻥긋하지 않고 있지만 귓가에서 끔찍한 아우성이 맴돈다. 끝을 알 수 없는 비명, 사이렌 소리, 날 감싸던 자세 그대로 억지로 내팽개쳐진, 한때 엄마였던 검은 형상. 내 반쪽을 집어삼킨 검붉은 화상자국.
“은하야? 괜찮은 거야?”
“김은하! 왜 그래, 무섭게…”
가슴이 터질 것 같다. 팔다리에 힘이 빠지면서도 숨을 몰아쉬는 걸 멈출 수 없다. 온몸이 물속에 갇혀 있는 것 같다. 온 세상이 검게 물들고, 숨이 턱 막히는 순간, 물컹한 무언가가 내 입술에 닿았다. 동시에 한 줄기 숨결이 들어오고, 의식은 저 멀리 사라져 버렸다.
저녁 10시. 수경이는 이미 집으로 갔고, 저는 마인드맵을 정리하며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습니다. 과호흡 증후군이 어떤 것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무섭다는 생각을 떨칠 수는 없었습니다. 은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 역시 믿기 힘들었습니다. 만약 혼자 있었을 때 그런 일이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상상하기만 해도 과부하가 일어날 것만 같습니다.
“왜 아직까지 안 가고 있어?”
깨어났나 보군요. 남은 정보는 집에 가서 처리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이제는 괜찮아?”
은하는 대답하지 않다가, 몇 분이 흘러서야 겨우 한 마디를 내뱉었습니다.
“미안해…걱정시켜서…”
안드로이드에게 필요한 것이 한 가지 더 추가되었네요. 지금 은하를 위해 눈물을 흘려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습니다.
“미안할 게 뭐있어…오히려 내가 미안하지. 싫어하는데 억지로 들어온 게 아닐까 걱정도 되고…지금 사과…”
“그런 거 아냐.”
평소보다 날카로운 한 마디. 어느새 은하는 제 허리에 양 팔을 감아 세게 붙들고 있었습니다.
“싫어한다고 한 적 없어. 진짜, 진짜로 고마워.”
알 수 없는 웃음이 새어나왔습니다. 은하가 이 한 마디를 하기 위해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어느새 저희 둘은 서로를 껴안고 있었습니다. 아무런 소리도 없이. 온 세상이 침묵에 빠져들었습니다.
유리의 손길이 부드럽게 내 얼굴을 쓸고 있었다.
“혹시 얼굴을 보여 줄 수 있을까?”
방금 전 유리가 했던 질문이었다.
“무슨 뜻이야?”
“실례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얼굴을 만지게 해 줬으면 좋겠어. 내가 세상을 보는 방식이니까.”
유리가 진심이라는 걸 알면서도 망설여졌다. 흉터가 남은 부분을 만질 때마다 찌르는 것 같은 자극이 느껴졌기 때문에, 지금껏 누구에게도 만지게 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리는…
유리의 손가락은 길고 하얗고, 매끄러웠다. 하지만 가까이서 보니 비인간적인 무언가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예상대로, 손가락이 흉터에 닿자마자 간헐적인 고통이 찾아왔다. 아무런 느낌이 없을 것이라고 했지만, 누가 되었던 만질 때마다 불타는 것 같은 아픔이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은 참고 싶었다. 고통스러운 몇 분이 지나고, 유리는 그 감촉을 기억하려는 듯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날 가만히, 미소 지으면서 토닥여 줄 뿐이었다.
3 – Hard lovin‘ girl
3 – Hard lovin‘ girl
어젯밤 잠이 들기 전까지, 은하가 절 붙들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아마도 안도감과 슬픔, 기쁨이 교차했기 때문이겠죠. 제가 할 일은 그런 은하를 가만히 위로해 주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미안해…모두한테 전부 다…미안해…”
다시 숨이 막힐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 속에서, 은하는 몇 번이나 되풀이했습니다.
“이제 그만 사과해도 괜찮아.”
울음소리가 절 향했습니다.
“어떤 일이 있었던, 그건 사고였어. 어쩔 수 없는 일로 자책하지 마.”
조금이나마 진정된 듯 은하의 울음소리가 가라앉기 시작했습니다.
“너 안드로이드…였구나.”
난데없이 은하가 말했고, 이 결정타에는 저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안 거야?”
“아까 손…차가웠어, 심장도 안 뛰고…”
“어떻게 생각해?”
은하는 절 올려다보았습니다.
“무슨…”
“나를 알았던 사람들의 절반은,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난 뒤에…자기가 속았다고 생각했어. 너의 생각도 궁금해서 그래. 지금은 내가 싫어?”
은하는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아까보다 더 가라앉은 목소리로 은하가 대답했습니다.
“…싫지 않아. 그러니까 오늘은…오늘은 여기 있어 줘.”
그렇게 은하는 봇물이 터지듯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난…나는, 사고가 터지기 전에 좀 더 밝은 아이였어. 그랬었던 거 같아. 지금은 아무도 없지만 그때는 친구들도 있었고…그런데…사고를 겪고 나서 모두 날 싫어했어. 다들 멀리하려고 했고, 조롱하고, 비난하고…그래서 날 숨기려고 했어. 남들 눈에 보이지 않으면 놀림받을 이유도 없으니까…”
은하는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 나갔습니다. 마치 잘 짜여진 영화의 줄거리를 설명하듯이.
“그런데…여기 오고, 널 만나고, 둘이서 지낸 건 몇 시간이었지만 처음에는 안심했어, 넌 내 흉터를 못 보니까 편견 없이 날 대할 줄 알았어. 그래서, 그래서…”
은하는 잠시 말을 멈추고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습니다.
“…난 널…적응하기 위한 수단으로 쓴 거야…그랬으면 안 되는 거였는데…”
이제 은하의 어조에는 혐오스럽다는 감정이 묻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저를 향하지도, 누구를 향하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을 향해 거세게 쏘아대는 혐오였습니다.
“나…어떻게든 적응하고 싶었어…그런데 지금은…모르겠어. 너한테는 버림받고 싶지 않아. 제발…날 버리지 말아 줘…”
동정보다는 슬픔이 앞섰습니다. 저에게도 방향은 달랐지만 비슷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을까요.
“정말 미안해…내가 다 망쳐 버렸어…”
은하는 완전히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평소의 저라면 뭔가 위로가 될 만한 말을 해 주었겠지만, 지금은 저도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은하를 세게 안으며 속삭이는 동안 제 마인드맵이 폭풍을 일으키듯 반응했습니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잖아. 절대 버리지 않을 거라고 약속할게. 난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계속…….””
그 말이 제 하루치 기록을 마무리했고, 은하의 울음소리가 점점 잦아드는 것을 들으며 저도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축제의 첫날은 이미 지났지만, 남은 시간을 즐기려는 아이들은 아직 에너지가 넘쳐흘렀다.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 분위기인 데다가, 연신 떨리는 온몸을 진정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해야만 했다. 하지만 오늘은 만날 사람이 있다. 저 멀리서 그 아이가 보였다. 두 눈을 지그시 감고, 계단에 앉아 점자책을 두 손에 들고.
유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뭘 생각하고 있을까. 바로 앞까지 다가간 뒤, 나는 유리의 옷소매를 살며시 잡았다. “나야, 김은하. 안 늦었지?” 유리는 미소를 지으며 내가 말한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안 늦었지. 수경이는 먼저 갔어.” 다행히 늦지는 않은 것 같았다.
난 사고를 겪은 뒤로 세상에서 도망쳐왔다. 그러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조금씩 세상으로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피어오르고 있다. 유리는 한 손으로 지팡이를 들고서 다른 손으로는 나와 팔짱을 꼈다. 이 학교에 처음으로 오게 된 뒤로 12일 동안 너무나 많은 일이 있었다. 유리와의 만남, 수경이와의 만남, 공황 발작, 밤중의 대화, 축제…….나는 여전히 살아 있고, 가족들과는 만날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도 어느 정도는 견딜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그시 눈을 감으며 아침의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렇게 축제의 둘째 날이 시작되었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와우~
고등학생이 이런 글을..
여기서 소설을 읽다니. 신선하고 재미있습니다.
인준 군~ 또 써주세요~
‘본문 음성으로 듣기’를 틀어놓고 눈으로는 글을 읽으며 소설을 보고 들었습니다.
은하와 유리가 꼬옥 안고 있는 장면에서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글의 시점이 은하와 유리 사이를 오가며 진행되어 둘의 입장에서 느낄 수 있어 좋았습니다.
장애를 가진 안드로이드와 장애를 가진 인간, 장애를 공통분모로 인간과 안드로이드의 우정을 설득력있게 묘사해 주어서 짧은 영상드라마를 보는 기분이었습니다.
임팩트 있는 소설 앞으로도 많이 써주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