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시각, 잠들지 못 하고 침대에서 뒤척거리는 사람은 한 명 더 있었다. 은하와 같은 반의 장유리는 천장을 봤다가 벽을 봤다가 이리저리 몸을 굴렸다. 딱히 잠이 오지 않았다.
은하, 김은하. 오늘 전학 온 그 아이는 표면적으로는 여타 수줍음 많은 아이들과 다를 바 없었다. 역시 눈에 띄는 부분은 그 얼굴이었다. 머리카락으로 감추려 해도 가릴 수 없는 그 흉터가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왜, 어떻게 그런 상처를 입은 걸까.
한동안 갈피를 못 잡던 유리는 눈을 꾸욱 감고 이불을 덮었다. 피로 탓에 그 영상만 선명해질 뿐 다른 생각은 떠오르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노크 소리에 화들짝 놀라 침대에서 일어나자 햇살이 드리운 창가가 눈에 들어왔다. 잘려면 조금만 잘 생각이었는데, 바보 같기는. 어중간하게 풀린 피로로 무거운 몸을 일으키는 동안 노크 소리가 몇 번 더 들렸다.
“장유리, 안에 있어?” 유리는 침대에서 일어나 급히 의족을 신은 뒤 밴드가 잘 묶여 있는지 확인했다. 지난번에 밴드가 풀려 넘어졌을 때의 경험 탓에 대충 넘길 수는 없는, 엄연한 하루 일과였다. 대략적인 모양은 사람의 다리와 같지만 약한 광이 도는 검은색 의족은 이제는 단순한 보조기구가 아닌 신체의 일부나 다름없었다.
이윽고 문을 열자 곱슬곱슬한 검은색 머리칼이 유리를 반겨 주었다. 유리와 같은 반인 최수경이다.
“의족이야, 늦잠이야?”
“둘 다야. 미안해, 많이 기다렸어?” 유리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 수경이는 웃음을 터뜨렸다.
“‘많이’가 정확히 얼마인 건데? 5분 기다렸으니까, 내 기준으로는 많은 건 아니지.” 수경이가 말했다.
유리는 그 머리카락을 보며 항상 미역 같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도 별반 다르지는 않았다. 오히려 기숙사 복도의 조명 탓에 더 번들거리는 것 같았다.
“그래? 그럼 기다려, 씻고 나올게….” 하품을 길게 내뱉으며 유리가 닫던 문을 수경이가 붙잡았다.
“잠깐, 뭐 하는 거야!”
“네 기준으로 많은 건 아니라며, 그러니까 5분만 더!”
“싫어, 많이 기다렸으니까 나와…!”
“지각한 것도 아닌데 뭐 어때서 그래! 그럴 거면 그냥 들어오면 되잖….”
전혀 고등학생의 그것이라 할 수 없는 둘의 유치한 실랑이는, 곧 나타난 다른 사람에 의해 끊겨 버렸다.
“비켜 줄래…?”
둘은 문짝을 사이에 두고 고개만 소리가 난 방향으로 돌렸다. 얼굴로 올린 손 너머로 미처 가리지 못 한 흉터가 유난히 시선을 끌었다. 은하였다.
“아, 응.” 수경이가 순순히 뒤로 물러나자 은하는 둘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결코 느리지 않은, 누가 보나 급하지만 전혀 빠르지도 않은 걸음걸이였다.
“누구야?” 수경이가 유리에게 물었다.
“김은하잖아, 전학생. 자느라 못 들었냐?” 유리가 대답했다.
수경이는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은하를 돌아보던 틈을 타 유리는 문을 휙 닫아 버렸다.
“어? 야!”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수경이가 문을 두드렸지만, 유리는 이미 욕실로 들어간 뒤였다.

그 뒤에도 유리는 은하에게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은하는 전혀 예상치 못 한 곳에서 유리의 주의를 끌게 되었다. 며칠 뒤, 사회 시간이었다. 유리는 교과서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졸고 있었다. 굳이 궁금하지도 않은 경제에 대한 내용보다 소속 동아리인 체조부의 연습이나 하고 싶었지만 그때까지 시간을 때울 최선의 방법은 낙서와 잠뿐이었다. 문득 시선 너머에서 무언가가 주의를 끌자 유리는 고개를 들었다. 은하는 바로 옆 자리였고, 덕분에 은하가 화장실이라도 갈 건지 손을 엉거주춤 든 채로 뒷문으로 나가는 것을 누구보다 먼저 볼 수 있었다. 아이들이 뒤늦게 저마다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만큼 은하가 아이들의 시선을 끌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사회 수업을 진행하던 담임선생님 역시 그 모습을 보았지만, 보건실에서의 연락이 있었던 탓에 굳이 은하를 막지는 않았다. 다만 한숨을 내쉬고는 아이들의 주의를 다시 돌릴 뿐이었다.

“유리야, 잠깐 나 좀 볼까?” 그날의 수업이 끝나고 담임선생님이 유리를 불렀다. 유리는 은하 때문이 아닐까 하고 대충 넘겨짚었지만, 정말 은하에 대한 내용이라는 것을 알고 나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게 아니라, 혹시 은하하고 친하게 지낼 생각 없니?”
유리는 “네?” 하고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담임선생님은 말을 이었다.
“싫으면 싫다고 말해도 좋아, 옆자리에 앉는 입장에서도 그렇고, 은하가 그나마 말을 거는 게 너뿐이라서 그래.”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단순히 옆자리라서 그런지, 우연히 최근에 읽은 책이 겹쳐서 그런지 은하는 유리에게는 조금 편하게 입을 열었고, 그것만큼은 유리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으음….” 유리는 대답을 망설였다.
“내키지 않을 수도 있지만 강요는 하지 않을게.” 담임선생님은 마지막 카드를 꺼내들었다. 반에서 아무도 소외되지 않게 하려는 그의 각오는 새 학기가 될 때마다 무참히 조각났다. 어떻게 하는 소외되는 아이가 생겼고 인위적인 방법을 사용한다 한들 바뀌는 것은 없었다. 그는 이제 거의 포기할 생각이었다. 즉 그에게 있어 아이들을 이어주는 중계인 역할은 올해가 마지막인 셈이었다.
“네, 한 번 해 볼게요.” 유리는 흔쾌히 동의했다.
한 번 해 보겠다고 하긴 했지만, 아직까지 둘은 이렇다 할 접점이 없었다. 둘의 재회는 더 우연한 상황에서 벌어졌는데, 거의 우연에 의한 일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사흘 뒤 금요일, 수업이 모두 끝난 뒤 유리는 도서관에 들렀다. 지난주에 빌렸던 책을 반납하기 위해서였다.
“이거 반납할게요.” 사서는 유리를 힐끔거리더니 바코드를 찍었다. 언제나 이 일만 해 왔다는 듯, 기계처럼 능숙한 동작이었다. 그 뒤 유리는 도서관 뒤쪽 구석으로 향했다. 공부를 하던 독서를 하던 다른 곳보다 조명이 적어 상대적으로 어둡고, 왠지 지하실을 연상시키는 냄새도 나는 탓에 학생들이 오는 빈도수도 높지 않아 유리는 언제나 책을 읽을 기회가 생기면 구석을 택했다. 물론 지하실 냄새를 좋아하는 유리 나름의 이유도 있었다. 다만, 오늘은 먼저 온 사람이 있었다.
은하는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의자에 걸터앉아 표지가 붉은 책을 읽고 있었다. 유리는 별 상관없다는 태도로 맞은편 자리에 앉았지만, 은하는 누가 이런 구석까지 오겠냐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은하가 급히 고개를 들자 드러난 두 눈이 전조등에 놀란 토끼 같았다. 은하는 한 쪽 이어폰을 빼던 자세 그대로 유리를 바라보았다.
“아, 미안해.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은하는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저었다.
“아, 아냐…괜찮아.”
“저기, 혹시 여기서 읽어도 될까?” 솔직히, 유리는 지난 며칠간 은하를 보면서 소심해 보인다는 것보다는 불량스럽다는 느낌을 더 많이 받았다. 수업 중이든 아니든 말도 없이 나가고, 아무하고도 말을 안 하려 하고, 표정은 항상 그늘져 있고. 은하는 조금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분히 반기지는 않는 분위기였다.
은하가 읽던 책의 제목이 조명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카밀라,’ 분명 19세기의 고딕 소설 중 하나였다. 읽은 기억은 없었지만.
은하는 책 내용에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집중하는 것 같았다. 거의 2분에 한 번씩 페이지가 넘어갔고, 유리가 고른 책들의 도입부를 읽어 보고 몇 권을 골랐을 때 은하는 이미 책을 다 읽은 뒤였다. 덕분에 둘은 거의 동시에 도서관에서 나오게 되었다.
“어떤 것 같아?”
“뭐가?” 은하는 질문이 끝나는 즉시 되물었다. 숄더백에 빌린 책을 넣느라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어림잡아 300페이지는 되어 보이는 게 3권. 내일부터 주말이니 그런 걸지도 모르겠지만 근 1주일간 은하는 책을 읽는 모습과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는 모습을 제외하면 다른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시피 했다. 물론, 그 중에서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은 책을 읽는 모습이었다.
유리는 자신이 한 질문을 곱씹어 보았다. 확실히 학교에 대한 감상을 묻는 건 아직 너무 이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유리는 몇 분 뒤 입을 열었다.
“책 되게 많이 읽더라? 안 지루해?”
은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그냥 취미니까.”
그냥 취미. 그 이상의 의미를 두지도 않고, 의미를 두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 싶지는 않다는 어투였다. 재미있어졌다. 소심하다는 첫인상과는 확연히 다른 점이 보였다.
“혹시 배고프지 않아?”
은하는 바닥을 보고 걷던 중 고개를 들었다. 그러더니 웅얼웅얼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럼 같이 먹을래?”
손과 머리카락으로 가리지 않은 은하의 한쪽 눈이 커졌다. 분명 대답을 망설이고 있을 것이었다. 유리는 기다려 주었다. 은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몰랐지만 거절하면 바로 받아줄 생각이었다.
1분이 넘도록 은하가 입술을 깨물며 가만히 있기만 하자 유리는 그 생각을 더욱 굳혔다. 하지만, 마침내 은하는 대답해 주었다.
“응, 그럼…어디서 먹을까?”
둘은 자율학습에 늦지 않는 것을 고려하다가, 결국 기숙사의 쉼터 발코니에서 샌드위치를 먹게 되었다. 지나친 신중함이 불러온 결과라 하겠다.
“입맛에 맞지 않을까 했는데 다행이네, 괜찮아?”
은하는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은하의 먹는 모습은 단순히 음식물을 입 안에 쑤셔 넣는다는 느낌을 주었지만 만족하기는 하는 모양이었다. 이후 둘이 식사를 마칠 때까지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사이렌 소리가 들린 것은 그 다음이었다. 태양이 넘어가고 있는 산 너머로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연기의 양으로 보아 큰 불은 아닌 것 같았지만, 소방차가 출동한 것을 보면 꼭 그렇지도 않은 듯 애매했다. 유리는 그 광경을 걱정스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은하는 완전히 경직된 모습으로 산 너머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은하야?” 유리가 부르자 은하는 고개를 휙 들었다.
“나 먼저 들어갈게.”
“갑자기? 다 먹지도 않았잖아.”
은하는 도망치듯 그 발코니에서 멀어지면서 반쯤 남긴 샌드위치를 쓰레기통에 밀어 넣었다. 자율학습 시간에도, 기숙사로 돌아가는 중에도 은하는 말 한 마디 하지 않았다. 유리가 아프다 싶으면 말하라고 하자 그제서야 간신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유리는 의족을 풀어 벽에 기대어 놓았다. 하루 종일 차고 다닌 밴드 자국이 선명했지만 익숙했다. 무릎 아래로 둥그렇게 남아 있는 왼쪽 다리의 그루터기에는 수술로 남은 흉터가 있다. 유리는 혹시 상처가 나지는 않았을까 그것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문득, 희미하게 기억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유리는 눈을 감고 침대에 누웠다. 머리를 절래절래 흔들며 그것을 지우려 하는 동안 늦은 저녁은 밤이 되었고, 유리는 곧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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