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게 일 년 중 가장 중요한 행사가 매해 7월 중순, 지리산 기슭에 자리한 덕산고에서 열립니다. 학생들과 사흘 동안 인공지능을 활용해 과제를 수행하고, 기술이 바꿀 사회와 자신의 미래를 함께 고민하는 진로융합 과정입니다. 올해로 벌써 네 번째를 맞았고 지난 주에 열렸습니다.

빛의 속도로 변하는 AI 기술을 익히고, 그것을 활용해 과제를 완성하며, 그 과정에서 기술의 가능성과 한계까지 성찰하는 일을 사흘 안에 해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준비에는 많은 노력이 들고, 진행하는 동안의 긴장도 남다릅니다. 그럼에도 매해 즐거운 마음으로 이 도전을 받아들이고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덕산고 학생들이 배움에 임하는 태도입니다.

특강에서 처음 만난 순간부터 학생들의 자세는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2시간 가까이 이어진, 결코 흥미롭기만 한 내용은 아니었을 강의를 모두가 끝까지 경청했습니다. ‘소요’를 통해 다양한 그룹을 대상으로 수많은 강의를 해왔지만, 강의자로서 진심으로 존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물론 조용히 오래 앉아 있는 것만으로 좋은 배움의 태도가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인상 깊게 본 것은 낯선 이야기를 섣불리 밀어내지 않고 우선 귀 기울이는 학생들의 열린 자세였습니다. 빠르게 변화하는 AI 시대에는 지금 알고 있는 지식을 지키는 능력보다, 익숙하지 않은 생각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더 중요합니다. 덕산고 학생들의 경청은 그런 배움의 출발점처럼 보였습니다.

진로융합 과정이 진행되는 사흘은 그러한 순간들의 연속입니다. 서로 만나면 큰 소리로 반갑게 인사를 나눕니다. 지나가다 다가와 하이파이브를 하고 가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내년에는 꼭 AI 반에 들어오고 싶다는 말을 남기고 쿨하게 사라지는 친구도 있습니다. 식당에서는 조심스럽게 같이 식사해도 되겠느냐고 묻는 학생도 있었습니다. 하나하나는 사소해 보이지만, 이런 순간들이 모여 사흘의 공기를 만듭니다.

특히 “내년에는 꼭 AI 반에 들어오고 싶다”는 말에는 새로운 배움을 향한 갈망이 담겨 있었습니다. AI 기술은 지금 이 순간에도 바뀌고 있습니다. 특정 도구의 사용법을 한 번 익히는 것으로는 그 변화를 따라갈 수 없습니다. 새로운 것을 궁금해하고, 기꺼이 다시 배우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결국 AI 시대의 경쟁력을 결정하는 것은 지금 무엇을 알고 있느냐뿐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배우고 싶어 하느냐일 것입니다.

활동은 1·2·3학년을 섞어 구성한 모둠별 과제 수행으로 진행됩니다. 입시 부담이 상대적으로 덜한 2학년이 자연스럽게 모둠장을 맡는데, 그 리더십이 억지스럽지 않고 편안하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3학년들은 맡은 일에 묵묵히 최선을 다하고, 때로는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1학년들은 선배들의 친절한 도움을 받으며 처음 마주하는 도전을 즐깁니다. 사흘 동안 큰소리 한 번 나지 않는데도 일은 물 흐르듯 진행됩니다. 어느 한 사람이 앞에서 끌고 가기보다 서로의 상황을 살피고 빈자리를 채우기 때문입니다.

AI가 빠르게 답을 만들고 많은 작업을 대신해 주는 시대에도, 함께 일하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고 서로 다른 생각을 조율하는 일까지 기술에 맡길 수는 없습니다. 공감과 배려에 기반한 협업은 AI가 발전할수록 오히려 더 중요해지는 인간의 역량입니다. 덕산고 학생들은 그것을 설명으로 배운 원칙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결과는 늘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해마다 과제의 난이도를 두 배 가까이 높였는데도 수행 시간은 오히려 짧아졌고 결과물의 수준은 눈에 띄게 높아졌습니다. 더 반가운 것은 많은 것을 일일이 가르치지 않았는데도 학생들이 스스로 인공지능의 가능성과 한계를 생각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미래를 고민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이러한 성과에는 해마다 축적된 프로그램 운영 경험과 학교 선생님들의 평소 교육도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잘 마련된 조건을 실제 배움과 성과로 바꾸는 것은 결국 학생들입니다. 낯선 문제를 열린 자세로 받아들이고, 새로운 것을 계속 배우고 싶어 하며, 서로를 믿고 배려하면서 협력할 때 비로소 AI는 단순히 편리한 도구가 아니라 생각을 확장하는 도구가 됩니다.

덕산고의 AI 활동을 성공으로 이끈 힘은 무엇일까요. 저는 자신 있게 학생들의 태도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긴 강의를 끝까지 경청한 모습에서는 열린 자세를, 내년에는 꼭 AI 반에 들어오고 싶다던 말에서는 새로운 배움을 향한 지속적인 갈망을 보았습니다. 2학년의 자연스러운 리더십,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는 3학년의 책임감, 1학년을 향한 선배들의 친절에서는 공감과 배려에 기반한 협업을 보았습니다. 흔히 AI 시대의 핵심적인 소프트 스킬로 꼽는 역량들이 바로 덕산고 학생들이 사흘 동안 보여준 몸가짐 속에 있었습니다.

덕산고를 알게 된 이후로 저는 무엇이 이 학생들의 남다른 태도를 만들었는지 줄곧 궁금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물어보았지만, 모두 저처럼 감탄할 뿐 뚜렷한 답을 내놓지는 못했습니다.

지난 주말, 진주에서 일정을 모두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터미널로 향했습니다. 출발을 기다리던 중 우연히 덕산고 학생 한 명을 만났습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는데, 잠시 후 그 학생이 다시 나타났습니다. 손에는 아이스커피 한 잔이 들려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마셔본 커피 가운데 가장 감동적인 한 잔이었습니다.

그 한 잔으로 정답을 찾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 안에서 답의 어렴풋한 윤곽을 보았습니다. 배려는 설명 몇 마디로 가르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저절로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존중받은 경험을 다시 다른 사람에게 건네는 일이 오랜 시간 반복될 때, 그것은 비로소 자연스러운 태도가 됩니다.

AI 시대의 교육이 해야 할 일도 어쩌면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새로운 기술의 사용법을 가르치는 데 그치지 않고, 열린 자세로 배우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갈망하며, 서로를 믿고 배려하면서 협력할 수 있는 사람을 길러내는 일입니다. 그날 제가 받은 커피 한 잔에는 덕산고가 오랜 시간 만들어온 그런 교육의 힘이 담겨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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