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야를 막론하고 창작자가 자신의 작품이 어떤 환경에서 수용자를 만나게 될지 온전히 통제하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든 창작자가 공유하는 딜레마다. 시각 및 영상예술의 경우, 이미지의 크기는 그 자체로 핵심적인 미학적 요소이다. 미술관의 드넓은 벽을 뒤덮은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의 그림을 자그만 화집으로 보는 것은 그 그림을 안 본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영화 <인터스텔라(Interstellar)>(2014)를 아이맥스 영화관에서 본 사람과 핸드폰으로 본 사람이 우주의 광막함을 같은 정도로 느끼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에 더해, 그림이나 영화는 같은 작품이라도 가까이에서 보는 것과 멀찍이 떨어져서 보는 것이 다른 미적 체험으로 귀결되기 십상이다.

VR은 창작자가 의도한 스케일감, 즉 크기의 감각을 전달하는 데 강점을 지닌 매체다. 디즈니사에서 수십 년간 일한 애니메이터 글렌 킨(Glen Keane)은 가상현실 그림도구인 구글 틸트브러쉬 (Tilt Brush)를 쓰며 이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가상현실에서는 모든 캐릭터를 자신이 상상한 ‘실물크기’로 그릴 수 있다는 것이다. 작가가 평면에 그림을 그리거나 실사 이미지를 촬영할 때에는 종이나 프레임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VR 매체를 통해 가상공간에 그림을 그리면 종이나 프레임의 가장자리가 사라지게 된다. 그림은 2차원 공간의 한계에서 벗어나 3차원의 공간 속에서 조각이나 건축을 닮아간다.

크기의 감각에 대한 킨의 설명은 창작자의 관점에서뿐 아니라 이용자의 관점에서도 유효하다. VR 콘텐츠에서 작가가 3차원의 가상공간에 ‘그린’ 작품은 크기의 왜곡 없이 이용자에게 수용된다. 폴록의 그림이나 <인터스텔라>의 경우에서 보듯, 그림이나 영화는 창작자가 본디 의도한 크기대로 감상자에게 수용된다는 보장이 없다. 반면, VR 콘텐츠는 이용자가 HMD를 장착해 가상공간으로 원격현전하는 특성상, 콘텐츠 체험환경의 편차가 대폭 줄어든다. 그림이나 영화처럼 종이나 프레임의 크기에 따라 이미지가 축소되거나 확대될 일이 없고, 이용자의 눈과 기기에 출력된 화면의 거리값에 개인차가 거의 없다. 이용자는 창작자가 구축한 공간으로 들어가 인물 및 오브제를 창작자와 동일한 스케일감으로 경험한다. 그런 의미에서 가상공간은 늘 ‘실물크기’로 체험된다.

크기의 감각이라는 관점에서 채수응 감독의 <버디 VR(Buddy VR)>(2018)은 VR 매체에 특화된 장점을 잘 살린 사례이다. 이용자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전개되는 이 작품은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최고 VR 경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용자는 어느 소박한 사탕가게 안으로 원격현전하여 그곳에 살고있는 쥐인 버디와 친구가 된다. 곧이어 심술궂은 아이가 군것질거리를 헤집으며 버디를 잡으려 하자 이용자는 이에 맞서 버디와 함께 싸워야 한다.

이 작품에서 이용자는 버디와 어울리며 쥐가 경험하는 크기의 감각으로 사탕가게를 경험한다. 마치 거인국의 나라에 간 걸리버가 된 듯, 쿠키상자는 거대한 건물처럼 시야를 가로막고 자그만 막대사탕은 북을 치는 북채로 손색이 없다. 영화에서도 <앤트맨(Ant-Man)>(2015)이나 <다운사이징(Downsizing)>(2017)처럼 크기의 변화를 축으로 삼아 이야기를 끌고 간 사례가 있다. 이들 영화에서 크기의 감각은 큰 것과 작은 것의 대조를 통해 상대적인 방식으로 부각된다. 그러나 VR 콘텐츠에서 크기의 감각은 직접적으로 경험된다. 가상현실에서 이용자는 과학기술의 무리수를 무릅쓰지 않더라도 거인이나 소인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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