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정부는 인공지능(AI)을 활용해 가장 하위 등급의 공무원이 수행하는 업무 중 약 62%가 자동화 가능하다고 분석했다. 이를 바탕으로 연간 450억 파운드의 생산성 향상과 1만 명의 공무원 감축, 15%의 운영비 절감을 계획하고 있다. 그러나 이 수치는 과학적 검토보다는 정치적 수사에 가깝다. 분석에 사용된 모델은 ‘복잡성’을 이유로 비공개되었고, 현행 기술로 실제 자동화가 가능한지에 대한 검토도 생략되었다.

주목할 점은 자동화 가능성이 공무원 계층에 따라 구분되어 있다는 것이다. 행정보조는 62%, 중간 관리자급은 40% 내외, 최고위직은 0%라는 극단적인 수치가 제시되었다. 이는 반복 업무가 하위직에 몰려 있고, 상위직은 창의적 판단을 한다는 조직 내 권력 구조의 편견을 반영한 것이다. 다시 말해, 기술적 가능성보다 조직의 위계질서를 유지하는 방식으로 AI가 해석되고 있는 것이다.

미국 정부도 유사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지난 4월, 바이든 행정부는 각 연방기관에 AI 도입 계획을 의무화하고, ‘AI 책임 관리 책임자(Chief AI Officer)’를 지정하도록 했다. 반복적인 행정업무를 AI로 대체하겠다는 입장도 명확히 했다. 인사관리처(OPM)는 AI를 활용한 채용, 민원 응대, 문서 검토 등을 강조했지만, 이로 인한 공공서비스의 질 저하나 고용 감소에 대한 구체적 분석은 제시되지 않았다.

양국 모두 기술 도입을 공공영역 구조조정의 수단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문제는 이들이 말하는 자동화 가능성이 지나치게 정태적이며, 노동을 가치가 아닌 비용으로 환산한다는 데 있다. 업무의 양이 줄어든다고 해도, 새로운 수요와 사회적 관리비용은 대부분 간과된다. 실제로 기술정책 전문가들은 AI가 일부 업무를 대체하더라도 신규 문제와 관리 비용이 증가해 오히려 비용 절감 효과가 크지 않다고 지적한다.

한국 사회도 예외는 아니다. 일부 지자체와 공공기관은 이미 민원 챗봇, 문서 자동분류, 보고서 초안 생성 등에 AI를 도입하고 있으며, 정부는 ‘공공부문 디지털 전환 전략’을 통해 AI 기반 혁신을 추진 중이다. 그러나 AI 도입이 곧 효율로 이어진다는 단순한 등식은 위험하다. 공공서비스는 반복이 아니라 맥락과 신뢰, 인간성과 책임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AI는 기술일 뿐이다. 그것이 어떤 철학과 목적 아래 설계되고 운영되는가가 더 중요하다. 만약 정부가 AI를 단순한 ‘절감 도구’로만 인식한다면, 공공서비스는 인간적 존엄과 사회적 책임을 잃게 될 것이다. 행정보조 업무가 반복적이라고 해도, 그것은 시민과 가장 가까운 접점이며, 가장 많은 정서적 노동이 투입되는 자리이다. 이를 기계로 대체하겠다는 생각은 공공성이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기술의 도입 여부가 아니라, 그 도입을 이끄는 가치와 철학이다. AI는 효율을 높이는 도구가 될 수는 있어도, 사람을 대체하는 목적이어서는 안 된다. 기술을 중심에 두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중심에 둔 기술 사용, 이것이 공공영역에서 AI를 바라보는 출발점이어야 한다. 영국과 미국의 사례는 우리에게 경고한다. 민주주의 사회의 공공혁신은 기술이 아니라 책임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쇄하기
이전
0

소요 사이트를 방문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액수에 관계없이 여러분의 관심과 후원이 소요 사이트를 유지하는 데 큰 힘이 됩니다. 후원금은 협동조합 소요 국민은행 037601-04-047794 계좌(아래 페이팔을 통한 신용카드결제로도 가능)로 후원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