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들이 2020년 올해의 사자성어로 ‘아시타비’(我是他非)를 선정했습니다. 이른바 ‘내로남불’을 한자로 옮긴 것인데, 글자 그대로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라는 뜻입니다. 오직 내 생각만 옳다고 고집하고, 나와 다르면 배척하고 심지어 적으로 간주하는 행태가 2020년의 대한민국을 상징한다고 본 것이죠. ‘아시타비’ 사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2020년은 코로나19와 싸운 힘겨운 한 해였습니다. 방역 모범 국가라는 찬사를 받았지만 상황이 악화돼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위기의 연말을 맞고 있습니다. 코로나 말고 2020년을 기억할 수 있는게 또 무엇일까요? 단언컨대 전현직 법무장관, 현직 검찰총장의 이름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1년 내내 거론되지 않은 날이 거의 없었습니다. 이들의 이름을 연결 고리로 피아로 갈려 극심한 대결 양상이 펼쳐졌습니다. 지금도 진행형이죠. 나만, 우리만 옳다는 겁니다.
옳고 그름을 명확히 가리는 게 그리 쉽지만은 않습니다. 누구나 자기중심적인 측면이 있습니다. 선입견에 사로잡히거나 이해관계에 얽히기도 하죠. 하지만 잣대가 있습니다. 어떤 사안이 사실에 근거했는지 여부, 누구나 수용할 수 있는 상식, 그리고 정의나 도덕, 윤리적 기준 등입니다. 여기에 스스로를 반추하며 스스로를 교정하는 게 건강한 사회입니다. ‘아시타비’는 이런 기준이 무력화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치적 이념과 지향은 건강한 논쟁을 촉발해 사회 공동체를 더욱 굳건하게 받쳐주는 밑바탕이 됩니다. 성숙한 민주주의로 가는 지름길이죠. ‘아시타비’는 이와는 정반대입니다. 논쟁은 없고 공격만 있습니다. 민주주의에 역행하고, 일방의 길만 강요하게 되는 겁니다. 잘못은 인정하는 게 아니라 감추고 정당화하려 합니다. 다른 의견이나 주장은 아예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투표 결과조차도 부정선거라고 주장하는 미국 사회 일각의 모습이 ‘아시타비’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미국 대선 불복 집회, 유투브 캡처
지금은 정보가 제한되고 차단되던 시절이 아닙니다. 이게 ‘아시타비’의 배경이나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정보는 오히려 산더미처럼 차고 넘치죠. ‘아시타비’ 풍조는 어쩌면 정보의 선택권이 무뎌지고 있는 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디지털 세상에서 모든 정보는 스마트폰과 컴퓨터를 통해 전달됩니다. 우리가 선택해서 뉴스와 정보를 찾아 보는 것처럼 보이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뉴스와 정보는 포털과 SNS, 유투브 등을 통해 유통됩니다. 전세계가 같은 환경입니다. 이들 미디어의 상업성은 수용자의 구미를 최대한 맞춰주는 겁니다. 한 번의 검색은 비슷한 내용의 콘텐츠를 끊임없이 추천하면서 떠나지 못하게 붙들어 맵니다. AI와 첨단 기술은 취향 저격의 친절이 몸에 뱄습니다. 콘텐츠 선택권을 사실상 대리 행사하고 있는 셈입니다. 누구나 유투브가 챙겨주는 내용에 빠져 시간가는 줄 몰랐던 경험을 갖고 있을 겁니다.
비판 의식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스스로의 판단 능력이 흐려지면 자기 생각을 갖기 어렵습니다. 대세에 휩쓸리거나 흥미만 쫓게 됩니다. 기술이 주는 혜택에만 매달리면 자칫 스스로를 잃게 될 위험성이 있습니다. 비판적 사고가 아니라 수용적 사고에 빠질 수 있습니다. 미디어 리터러시(media literacy)의 중요성이 갈수록 부각되고 있습니다. 일방이 아닌 미디어의 열린 취사 선택, 콘텐츠의 열린 취사 선택이 스스로를 키우는 힘이고, 사회를 건강하게 이끄는 지렛대가 됩니다. ‘아시타비’와 대비되는 사자성어는 ‘역지사지’(易地思之)입니다. 처지를 바꾸어 생각한다는 뜻이죠. 상대방을 이해하고 배려하려는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역지사지, 측은지심, 공감능력… 다 연결되어 부족한 듯 보입니다. 유튜브 알고리즘의 친절한 안내와, 나에 대해 나보다 개인정보를 더 잘 취합한 디지털 도플갱어가 알아서 판단해주니까, 내 의지인양 착각하며 저부터도 끌려다니고 있거든요. 디지털 리터러시란 단어의 무게가 느껴집니다.
반성하며 읽었습니다. ~~